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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6호(6월)

[고문헌 산책4] 김장군전(金將軍傳)

[고문헌 산책] 김장군전(金將軍傳)

 

사르후(심하) 전투에서 순절한 김응하,
明에 대한 의리와 사대의 체면을 살리고 사직을 보존한 구국의 영웅이 되어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이번 호에서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호국 인물로 평가받았던 김응하 장군의 위인전, <김장군전>을 소개합니다.

 

<김장군전>이란?

<김장군전>은 ‘김씨 성을 가진 장군의 위인전’이다. 여기서 김장군은 사르후 전투에 참여하였던 조선군 장수 김응하를 말한다. 김응하는 무과 출신으로 명나라가 후금을 정벌하고자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였을 때 조선군의 좌군 조방장으로 사르후(심하)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패하였고, 대부분 도망가거나 항복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응하는 좌군을 이끌고 끝까지 싸우다 후금에게 조선군의 기상을 남기고 순절하였다.
전투 결과는 평안감사의 장계로 조선 조정에 보고되었다. 김응하를 칭송하는 공론이 모아졌고, 그의 가족들에게는 상금이 내려졌으며, 광해군은 명나라 장수들이 다니는 길목에 사당을 세우도록 하고 편액을 내렸다.
이러한 숭모사업과 함께 그의 행적을 기리는 ‘김장군전’이 지어졌으며, 동시에 그를 추모하는 詩도 지어졌다. 당시 조선의 신료들은 ‘부모의 나라인 명나라를 위하여 조선이 할 수 있는 의리를 다한 상징적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래서 그를 길이 기리고자 그의 전기와 추모시를 모아 책으로 간행하였다. 그 책이 바로 이번에 소개하는 <김장군전>이다.

사르후 전투 

사르후 전투는 요동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후금에 맞서 명나라의 요동군이 1619년 무렵에 후금과 치른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에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는 조선군도 1만여 명이 출전하였다. 전투 결과는 조명연합군이 대패하여 궤멸되었고, 강홍립 등 조선군 일부는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후금이 동북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고, 명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김장군전>의 구성

<김장군전>은 주인공인 김응하의 초상과 그의 행적을 담은 5개의 그림, 박희현이 지은 ‘김장군전’과 이에 대한 유몽인 등의 소감문, 이이첨 등 84인의 추모시와 후견인이었던 박승종의 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앞부분에 수록된 그림은 그의 행적을 상직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초상을 먼저 내세우고, 이어 적을 만나 진을 펼치는 그림, 버드나무에 기대어 적에게 활을 쏘는 그림, 죽어서도 검을 쥐고 있는 그림, 강홍립 등 두 원수가 투항하는 그림, 압록강변에 세워진 사당 그림이 이어진다.

<사후악검도: 죽어서도 검을 쥐고 있는 그림>

 

<김장군전>의 간행 배경

<김장군전>의 간행 배경에 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명나라를 위하여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김응하를 부각시키고 추모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조선이 후금과 내통하여 명나라를 배신할 것이라는 의심을 해소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광해군이 김응하의 사당을 명나라 장수가 다니는 길목에 세우라고 한 것도 명나라를 향하여 ‘조선 군인이 부모의 나라인 명을 위하여 치열하게 싸우다 죽었고, 조선 조정은 이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이만큼 기념하고 있다. 강홍립이 투항한 것은 우리 조선의 본의가 아니다.’라고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당파를 초월하여 신료들이 대명의리를 져버린 조선의 국왕을 압박하기 위한 강력한 의사 표현 목적이라는 것이다. <김장군전>은 김응하를 칭송한 반면, 조선군 가운데 도망자와 투항자를 짐승과 같은 존재로 비난하고 있다. 김응하를 죽게 한 것은 후금 군대인데, 그에 대한 비난보다는 의리를 져버리고 투항한 사람에게 비난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대명의리를 지키고자 목숨까지 버린 김응하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으로, 후금에 투항하여 목숨을 부지한 강홍립은 그와 반대로 인식하였다. 김응하는 곧 신료들이며 강홍립은 곧 광해군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신료들은 광해군을 ‘명과의 군신관계를 배반한 정통성을 잃은 군주’라고 책을 통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1622년 광해군이 황제의 파병 칙서를 거부한 다음 해에 광해군이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난 사실은 그러한 인식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김장군전>의 가치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17세기 초반에 당시 조선 지도층의 사고와 국제질서에 관한 인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상징적인 책이라는 점이다.
<김장군전>은 明과의 의리를 지켜 죽은 사람은 숭고하고 기려야 할 善으로, 후금에 투항하여 목숨을 부지한 사람은 짐승만도 못한 惡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김응하는 善을 실천한 대표 인물인 것이다. <김장군전> 본문에는 ‘장군이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200년 넘게 지성으로 사대한 의로움에 볼 것이 있었겠는가? 장군의 죽음으로 1,000년 토록 할 말이 있게 되었으니 장군은 곧 사직을 보존한 것이다.’라 하였고, 조선 학자들 또한 자신의 문집에서 ‘김응하가 있어 우리가 금수가 되는 것을 면했다’거나 ‘김응하가 없었다면 어떻게 천하에 해명할 수 있었겠느냐?’라고 그를 평가하고 있다. 그러한 인식 속에 1799년에는 정조가 직접 추모의 글을 지어 내리면서 재차 간행되었으며, 8권으로 분량도 늘어났다. 조선 후기 내내 김응하는 항복한 강홍립과 대비되면서 대명의리를 실천한 상징적 인물이 되어 자주 거론되었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이런 상상도 가능하다. 그가 만약에 전투에서 살아서 돌아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 후기 학자 성대중은 <의로운 죽음>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김응하는 인목대비(선조의 비)를 유폐시키라는 상소를 올릴 때 무신 가운데 가장 앞장서 참여하였다. 만일 그가 사르후 전투에서 죽지 않았더라면 1623년 광해군이 쫓겨나고 유폐에 동조했던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때에 화를 면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의 훌륭하고 훌륭하지 않음은 관 뚜껑을 덮고 나서야 정해지는 것이니, 이 때문에 군자는 의리에 맞게 죽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편집위원 최경훈, 학술정보서비스팀 고문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