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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60호(5월)

[고문헌 산책] 연잉군(영조)의 장서인

당쟁 속에서 왕이 되는 연잉군 이금(李昑) 장서인, “연잉군방(延礽君房)”

옛날 책, 고서를 보면,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도장을 ‘장서에 찍는 도장’이라고 하여 ‘장서인(藏書印)’이라고 부른다.

이번에 소개하는 장서인은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가 왕이 되기 전에 사용한 도장이다.
바로 ‘연잉군방(延礽君房)’이다. 이 도장은 대구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삼국사기』에 찍혀 있다.

영조의 책도장, 연잉군방

영조는 조선시대 국왕 중에 가장 오랜 기간 왕으로 있었다. 
1724년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되어 1776년 83세로 승하할 때까지 무려 52년 왕으로 있었다.
영조는 원래 후궁의 아들로 세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왕이 될 운명은 아니었다. 
세자도 아니었고, 왕비의 아들도 아닌 무수리의 아들. 
그래서 그에게는 ‘○○대군’이 아니라 서자에게 붙이는 ‘○○군’으로 봉해졌다. 
그런데 경종에게 아들이 없는 상황과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왕이 될 동생인 ‘세제(世弟)’로 책봉되었고, 
제20대 국왕인 경종이 끝내 세상을 떠나자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책에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나의 책’이라는 표시이다. 
나의 책으로 등록한다는 소유의 개념이 도장을 통해서 표현된 것이다. 
소중한 의미 있는 책이 아니라면, 도장을 찍지 않는다.
자신의 것이라는 도장을 찍지 않는 경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왕이 될 사람이나 왕이다.
왕은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의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이므로 ‘내 것’이라는 의미가 필요없다.

영조는 연잉군 시절, 왕이 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소중한 나의 책’이라는 소유 개념이 필요한 신분이었고,
그래서 도장을 찍은 것이었다. 세자였다면, 찍을 필요가 없었겠지만.


 

왼쪽 사진의 위에 찍힌 가장 큰 도장이 임금 도장이다. 임금 도장은 첫 권의 맨 앞장에만 찍힌다. 
두번 째 권부터는 찍지 않는다. 그래서 연잉군도 당당히 제목이 있는 면에 도장을 찍었다.

"도장 찍는 위치, 10대 후반 연잉군의 마음속 생각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도장이 찍힌 책은 아버지 숙종이 승정원을 통해 공식적으로 하사한 『삼국사기』이다.
임금이 책을 하사할 때는 첫 권에만 임금 도장, 바로 옥새를 찍는다. 이른바 직인이다.
직인은 권위의 상징이다. 어보를 국왕과 동등하게 인식하게 된다.
『삼국사기』에도 첫 권에만 임금의 도장이 찍혀 있다. 다른 권에는 없다.

영조는 아버지이자 국왕이 하사한 책을 받았다. 감사와 감동의 마음으로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소중한 책에 도장을 찍는다. 바로 ‘연잉군방’이라는 도장. 한번 보자.
도장이 두 번째 장에 찍혀 있다. 원래 도장은 첫 번째 장에 찍는데, 왜 그랬을까?

한 장을 넘겨 두번 째 장에 찍힌 연잉군의 도장, 이로써 불효·불충의 오해를 면했다


바로, 임금 도장을 피한 것이다. 
만약에 임금 도장과 같은 면에 자기 도장을 찍었다면, 무엇으로 인식되었을까?

혹시라도
“감희 임금과 겸상을 해? 저런 불효, 불충한 사람을 봤나? 근본없는 무수리 자식은 어쩔 수 없군”
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노론과 소론이 격렬하게 대립하던 시절, 어쩌면 공격의 대상이 되었을 지도 몰랐을 일이다.
10대의 연잉군은 아마도, 첫 장에 도장을 찍으려 하다가,
“아차” 하면서 찍으려는 동작을 멈추고 한 장을 넘겨서 조심히 찍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 생각과 행동에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연잉군방이 찍힌 책은 장서각에 하나 더 있다. 
1701년 내사받은 『춘추보편』인데, 동일하게 임금의 도장을 피해 두 번째 장에 찍혀 있다.
조선은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 역할을 하는 것을 기본 규칙으로 삼았다. 
신분의 제한된 역할을 넘어서면 역모, 강상죄로 죽음을 면치 못했다. 
고문헌 곳곳에 그 질서 의식이 은연중에 표현되어 있다. 도장 찍는 위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번 고문헌 산책에서는 연잉군의 장서인 날인 과정에 마음 속을 들여다 보았다.

<편집위원: 최경훈, 학술정보서비스팀 고문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