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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34호(4월)

[기획코너] 조선시대 전염병과의 싸움

[기획코너]  조선시대 전염병과의 싸움


  우리 역사에서 전염병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건 ‘삼국사기’에 실린 온조왕 4년(기원전 15년) 기록이다. 짧게 ‘역(疫)’이라고 돼 있다. 이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역병 기록은 통틀어 20여차례 보인다.  처용무는 처용(處容)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천연두를 옮기는 역신(疫神)으로부터 인간 아내를 구해냈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 궁중 무용의 하나로 현대까지 전승되고 있다.


<악학궤범 중  '기사경회첩'에 나타난 창경궁관처용과 처용무 춤사위>


  이번 '기획코너'는 조선시대 문헌에 기록된 전염병의 창궐과 이에 대한 임금들의 대처법을 알아보고자 한다.


▣ 태종, 전염병과의 전쟁을 시작

  조선왕조실록의 역병(전염병) 조문을 정리하면 1392년부터 1864년까지 470여 년간 모두 1,400여 건의 역병이 검색된다. 그 중 조선 왕실의 전염병 역사는 태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태종 18년, 동생인 성녕대군이 두창(痘瘡)의 일종인 완두창에 걸려 위독했으나 당시 점쟁이들은 성녕대군의 병이 호전될 것이라는 점괘를 내놓았지만 사망하고 말았다. 태종은 성녕대군의 사망을 계기로 본인이 직접 의서를 읽는 등 전염병에 대한 이성적인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독자적인 처방으로 전염병에 대응하기 시작하였는데, 숙종 재위 9년 10월 13일 한양도성에 천연두가 번지고 18일 후 숙종 임금이 천연두에 걸린다. 천연두 치료 전문의인 유상(柳瑺)이 주도해 화독탕(化毒湯)을 투여하면서 열이 차츰 가라앉았고, 보름이 지나자 얼굴에 딱지가 떨어지면서 호전됐다. 유상은 이 탕약으로 임금의 천연두를 치료한 공로로 동지중추사로 승진한다. 

두창 발진이 일어난 처음 홍점(紅點)이 나타나면 급히 화독탕(化毒湯)을 쓴다.  화독탕은 자초용, 승마, 감초 각 1전에 백작약 1전, 산사육 7푼 등을 달여 3일을 먹이되 하루에 두 번씩 먹여 두창의 모든 후유증을 없앨 수 있는 성약(聖藥)이다. <산림경제, 홍만선>

  한편 코로나19로 인해 자가 격리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진 요즘과 같이 조선시대에도 전염병이 발생하면 빠른 격리를 통해 추가 감염을 막아냈다. 현종은 자신의 딸이 두창에 감염되자 다른 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고, 영조는 빈궁에게 홍역이 발생하자 신하들의 경고로 거처를 옮겨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연이은 하교, 세심한 배려 역시 세종

  우리 역사의 황금기라 불리는 조선 세종 대에도 전염병은 발생했고 대처도 신속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전염병이 발생하자 세종이 치료와 구제에 노력한 기록이 여러 건 보인다.

  세종 14년(1432)  4월 21일자 세종실록 기사이다. 이때 세종은 8도 감사의 전염병 환자 구제대책 미흡을 지적한다.

“민간에 전염병이 발생하거든 구제하여 치료해 주라는 조항을 여러 번 법으로 세웠었는데, 각 고을의 수령들이 하교의 취지를 살피지 않아서, 금년은 전염병이 더욱 심하건만 구료(求療)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일찍이 내린 각 년의 조항(條項)을 상고하여 구료해 살리도록 마음을 쓰라.”

  ​다음날에는 불요불급한 각종 공역의 중지를 명한다.

“성중(城中)의 영선(營繕)하는 공사가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경기의 선군들도 또한 와서 역사에 나가고 있으니, 이 무리들이 아마 집을 떠난 채 전염병에 걸린다면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중 내월의 역사에 나가기 위하여 올라오는 도중에 있는 선군은 통첩을 내어 돌아가게 하는 것이 어떠할까.”

  ​전염병에 대한 세종의 심려 깊은 대처는 그 다음날에도 이어진다. 이번에는 전염병이 돌고 있는 와중에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실상을 보며 구호대책을 지시하고 책임자를 단호하게 문책한다.

“임금이 전염병에 걸린 자를 구호하지 못하고, 혹 생명을 상하게 하는 데에 이를 것을 염려하여 사람을 시켜서 거리를 돌아보게 하였더니, 소격전(昭格殿)의 종인 눈먼 여자 복덕(福德)이 아이를 안은 채 식량이 끊어져서 거의 죽게 되었다 하므로 임금이 놀라서 즉시 소격전의 전지기[殿直] 선숭렬과 북부령 유열을 형조에 내려 추국하게 하고, 복덕에게는 쌀과 콩 각 1석을 주게 하였다. “


 치료서 배포에서 제사까지 다양한 구휼책

  조선조에서는 전염병 구제에 구휼과 대규모 공사 중지 외에도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 가운데는 치료방법을 책으로 편찬해 전염병이 발생한 곳에 내려 보내는 것도 있었다.

  중종 20년(1525)  5월 6일 전염병 치료서를 전염병이 발생한 지역에 내려 보낸 당시 실록의 기사다.

"<벽온방(辟瘟方)>을 중앙과 외방에 반사하다”

  <벽온방>과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은 1524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평안도 전역에 여역(癘疫)이 크게 번져 많은 백성들이 사망하자 의관 김순몽, 유영정, 박세거 등에게 명하여 온역(瘟疫)치료에 필요한 모든 방문들을 뽑아 책으로 엮어 한글로 번역하여, 이를 1525년 5월에 널리 보급하였다.

<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이 소장한 ‘간이벽온방’>

  ​전염병은 세균, 바이러스 등과 인체가 벌이는 전쟁이다. 전염병을 이기는 비결은 단연코 우리 몸 자체의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최고의 대처법이다. <간이벽온방>에 기록된 면역력 증강법을 보면 "설날에 파, 마늘, 부추, 염교(일본어로 락교’(菜芝). 생강 등 다섯 가지 매운 음식을 먹을 것, 붉은 팥을 먹을 것, 창포술에 웅황(삼류화비소를 주성분으로 하는 광석)을 개어 먹을 것" 등이 있다. 모두 체온을 끌어올려 면역력을 기르는 방법이다.


▣ 죄수 방면, 시신 매장은 물론 제사도 지내주며 백성의 영혼까지 달래

 중종 21년(1526) 실록의 기사이다.

“충청도에서 여역으로 많은 사람이 죽게 되어 지극히 놀라우니 죽은 사람이 몇 명이고 병의 기세가 가라앉게 되는지를 계속해서 보고하도록 해야 한다. 또 죽은 사람의 수가 이미 4백 60여 명이나 되는데도 병의 기세가 점점 만연된다면 시기에 미처 구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평안도의 예대로 의약품을 내려 보내 마음을 써 구료 하도록 하고, 또한 중앙(中央)에서 제사지낼 것을 예조에 말하라.”

  중종 22년(1527) 2월 24일의 기사다.

“근래 백성들 가운데 병사한 자가 매우 많은데, 외방에는 전염병이 치성하니 진실로 사망자가 많을 것을 알겠다. (중략) 부자는 시체를 매장할 수 있겠지만 빈자는 혹 시체를 유기할 우려가 있다. 생각이 이에 이르니 어찌 측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략) 각도의 감사와 한성부에 효유하여 구장(舊章)을 신명(申明)케 하라.”

 광해군 2년(1620) 12월 10일자 기사다.

“전염병의 기세가 날로 성해진다고 하니, 활인서(活人署, 도성 내 병든 빈민들의 치료를 맡아보던 기관)로 하여금 각별히 치료하여 구완토록 하고, 여제를 다시 지내는 일을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효종 2년(1651) 4월 21일자 기사다.

“감옥 안에 전염병이 크게 성하자 주상이 승지에게 죄수를 조사하여 그 중 죄가 가벼운 자를 석방할 것을 명하였는데, 승지가 죄인 가운데 석방할 자와 석방하지 않을 자를 기록하여 아뢰니, 하교하였다. '이제 형조의 수안(囚案)을 보건대, 이미 석방하였는데 아직도 옥중에 있는 자도 있고 이미 가두었는데 죄수 명부에 기록되지 않은 자도 있으니, 무슨 이유인가. 당상은 추고( (推考, 벼슬아치의 죄과(罪過)를 추문(推問)하여 고찰함)하고 낭청은 파직하라."


 ▣ 전염병, 임금이 책임을 통감

  조선의 국왕들은 전염병이 돌면 비망기(備忘記, 임금이 명령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던 문서)를 내려 자책했다. 아래는 숙종이 재위 25년(1699) 1월 1일에 전염병이 돌자 내린 비망기다.

“아! 국운의 불행이 어쩌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4년 동안의 큰 흉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나머지 또 전에 없던 모진 여역(癘疫)에 걸렸는데, 봄부터 겨울까지 갈수록 더욱 치열해져 마치 물이 젖어들 듯 불이 타오르듯 하였다. 처음에는 서쪽 변방에서부터 시작하여 팔로(八路)에 두루 퍼져 마을에는 완전한 가호가 없는가 하면, 백에 하나도 치유된 사람이 없다. 그리하여 벌려 세운 병막(病幕)이 서로 잇따랐고, 신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 더욱 혹독한 경우에는 온 집안이 함께 몰살하는 참담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시체가 무더기로 쌓여 망령들의 울음소리가 처연하니, 병화의 급박함을 어찌 이에 비유할 것인가?  [중략] 아! 백성들이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으니 나라가 앞으로 무엇을 의지해야 하겠는가? 이 때문에 근심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침식도 편치 못하다. “

  전염병이 발생하자 신속한 치료와 함께 죽은 자는 매장해주고 제사까지 지내주어 죽은 자의 영혼까지도 달래주는 옛 임금들의 자세는 현재의 정치가, 행정당국과 공무원들이 가슴깊이 새겨야 한다..


  인간이 바이러스를 지구상에서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동안 우리는 작게는 감기에서부터 크게는 코로나19에 이르기까지 바이러스와 휴전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바이러스는 인간이 과학기술로 정복해왔던 그 어떤 자연의 존재보다 강력하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바이러스와 인간의 만남은 앞으로도 잦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신동원, 허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卞廷煥朝鮮時代의 疫病에 關聯된 疾病觀과 救療施策에 관한 硏究

- 동아일보, 이상곤의 실록한의학 시리즈 기사

<편집위원: 김한동, 학술정보지원팀 정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