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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헌 산책

<고문헌 산책 17>

 

신한첩(宸翰帖)

 

<신한첩>은 한마디로 왕실 편지를 모은 첩이고, 구체적으로는 조선시대 효종ㆍ현종ㆍ숙종의 3대 왕과 인선왕후ㆍ명성왕후ㆍ인현왕후의 3대 왕비 등 6인의 한글 편지첩이다. 이번에 국가문화재(보물)로 지정 예고 되었다.

 

수록된 편지는 효종 2편, 현종 3편, 숙종 6편, 인선왕후 18편, 명성왕후 1편, 인현왕후 5편 등 모두 35편이며, 편지를 받은 사람은 효종의 딸인 숙휘공주(淑徽公主)와 부군 정제현 등이다.

 

숙휘공주(1642-1696)는 1653년 12세의 나이로 경기도 고양에 거주하던 영일정씨 정제현(鄭齊賢)과 혼인하였다. 정제현은 포은 정몽주의 후손으로 조부가 당시 우참찬,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정유성(鄭維城)으로 명문가였다. 혼례를 하고 난 후 처음에는 시댁에서 사랑을 받으며 생활하였으나 결혼한 지 7년이 지난 1660년(19세) 무렵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에 들어 시부모와 시삼촌이 연이어 죽고, 남편 또한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1662년에는 21세로 죽었다. 이 일에 대하여 숙휘 공주의 모친인 인선왕후가 조사를 하게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시댁의 여종 예금이 고문을 받다가 죽기까지 하였다.
숙휘공주의 아들 태일(台一) 또한 공주가 44세 되던 1685년에 25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집 온지 10년이 되지 않아 시댁의 많은 사람이 죽었고, 남편과 자식 또한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 전통적인 유교 사회에서는 '복없는 여자'로 여겨졌을을 것이다. 또한 왕실이 개입하여 고문 끝에 여자 종 1명이 죽었기 때문에 집안의 노복들도 공주를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오빠가 되는 현종은 1670년 무렵에 출가한 여러 공주들의 저택을 너무 화려하게 지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민가를 강제로 허는 등 백성의 원망을 샀고, 이와 관련하여 조정의 대신들과 마찰을 벌이기도 하였다. 숙휘 공주의 저택 또한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삶을 살았던 국왕의 딸이며, 동생이며, 고모가 되는 숙휘공주였으며, 그가 받은 35통의 편지에는 그런 삶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불행이 시작되기 전의 편지에는 부모가 자식에게 던지는 농담 섞인 편지가 있고, 불행이 시작되면서 사위의 병환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편지가 있으며,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 혼자 남게 된 동생과 시누, 고모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가 있다.

 

조선시대 궁궐이란 비밀스럽고 신성스러운 공간이었기 때문에 왕실에서 받은 편지는 간직하지 않고 없애 버리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데 이 언찰은 지금까지 남아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왕실의 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은 아마도 연이은 마음 고생으로 병이 들었을 때 어머니와 오빠, 조카가 보내준 이 편지들을 읽으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기 때문에 그대로 집안에 전해졌을 것이다.

 

이 편지들은 1696년에 숙휘공주가 죽고 나서 100여 년이 지난 1802년에 선산 부사였던 5대손 정진석이 첩으로 만든 것이다.
책의 앞부분에는 정진석이 쓴 한글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이 첩을 만든 내력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두 첩이 건인즉 사조 어필이시요, 곤인즉 육성언찰이시라"라고 적고 있다. 즉 이 말은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던 어필들을 정리하면서 효종, 현종, 숙종, 영조의 사조의 어필(한자)을 따로 하나로 묶어 건이라 하고, 효종, 현종, 숙종 내외 육성의 언찰(한글)을 따로 묶어 곤으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책의 끝에는 숙종비 인현왕후가 손수 만든 선낭(仙囊) 쌍몸이 붙어 있었으나, 인수할 당시부터 유실된 체 그 윤곽만 남아 있어 아쉽다.

 


<숙종의 언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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