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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헌 산책

<고문헌 산책 8>

 

경상도지도(慶尙道地圖)

 

 

조선시대 지도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마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일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1834년(순조 34)에 제작한 <청구도>를 바탕으로 하여 1861년(철종 12)에 제작한 것인데, 그러한 고지도는 조선초기부터 많은 종류가 제작되어 국방 및 통치용 자료로 활용되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영조 재위 시절에 제작된 <경상도지도>인데 당시의 행정, 군사, 인구, 교통, 통신 등의 자료가 기록되어 있는 채색지도이다. 지도의 좌우측에는 경상도의 지리, 인구, 군사에 대한 정보가 묵서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경상도를 남도와 북도로 구분하고 있지만 그 때에는 낙동강을 경계로하여 좌도, 우도로 구분하여 좌도에 39개, 우도에 31개의 읍을 두었고, 현재의 도청에 해당하는 감영은 대구에 있었다.

지도에는 당시 읍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읍명은 시대에 따라 변경되기도 하고현에서 군으로 승격되기도 하고, 특별한 이유로 없어져 다른 읍으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읍명과 그 위상의 변천은 지도의 제작시기를 가늠하는 중요한 단서로 활용된다.

본 <경상도지도>의 제작시기를 영조 재위 시절로 판단하는 근거도 형태적인 특징 외에 읍명의 변천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현재 경상남도 산청은 1767년(영조 43) 이전에는 산음으로 불렸다. 그러던 것이 1767년에 산청으로 변경되었다. 그 연유는 7세 여아가 아이를 낳았다고 경상감사가 영조에게 보고하여 그 논의 끝에 명칭이 변경되었다.
둘째, 안음의 고을명 대신에 '革安陰'이라 하여 지도 제작 당시에는 안음이 혁파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 연유는 1728년(영조 4)에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였던 정희량의 출생지가 안음이었기 때문에 1728년부터 1735년까지 혁파되었다. 따라서 지도의 제작시기가 영조 재위 시절로 판단할 수 있다.
 당시 경상도 인구를 보면 393,989호에 인구는 1,715,333명이었으며, 남자가 784,959명, 여자가 930,374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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