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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추천도서

<이달의 추천도서>

 

"스승에 대한 단상"

 

박 대 홍 팀장(교육대학원 학사행정팀)
 

 

참된 스승은 어디에 있을까? 한 사람의 일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좋은 책이 될 수도 있지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부모 다음으로 좋은 스승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논어(論語)』술이편(述而篇)에 “세 사람이 길을 간다면, 그 가운데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느니라. 그 중 선한 사람의 장점을 취하여 배우고, 선하지 못한 사람의 단점을 가려내어 나의 허물을 고칠 것이니라.(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라고 하였다.

스승은 어디에서나 자신의 마음먹기에 따라 찾을 수 있다. 당나라 한유(韓愈)는 사설(師說)에서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나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도가 존재하는 곳에 스승도 존재하므로(是故無貴無賤無長無少, 道之所存, 師之所存也),” “자신보다 늦게 태어났어도 도를 들음이 자신보다 앞서면 그를 스승으로 삼고 따라야 한다(生乎吾後, 其聞道也, 亦先乎吾, 吾從而師之).”라고 하였다. 참된 스승을 찾아 끝없는 인생의 여정을 펼쳐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먼저 박영호 선생이 스승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살펴본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경주 작은 형 집에서 고시준비를 하고 있던 박영호선생은 갑자기 악화된 건강으로 고시공부를 그만 두게 되었다.『사상계(思想界)』에 실린 함석헌 선생의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스승에게 곧바로 편지를 쓰고 이후 40 ~ 50여 통의 서신을 교환하였다. 1956년 천안에 농장을 마련한 스승 함석헌이 농사를 지으면서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같이 지내자는 제의를 박영호 선생에게 하였다. 그곳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셋째 형수에게 광목으로 지은 다섯 벌의 한복과 자신이 직접 짚으로 엮은 짚신 스무 켤레를 괴나리봇짐에 싸고 경주를 출발하였다. 박영호 선생은 섣달 열흘 동안 걸어서 가다가 힘에 부치면 농사일을 거들어주면서 숙식을 해결하였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천안으로 찾아가 스승 함석헌과 같이 생활하였다. 낮에는 과수원에 거름을 주고 밭을 매었다. 밤에는 성경, 톨스토이, 사서삼경, 고문진보, 간디 자서전을 읽고 스승과 토론한 시간이 3년이었다. 어느 날 스승 함석헌은 더 이상 가르쳐줄 것이 없다고 하였다. 다시 박영호 선생은 스승의 스승을 찾아 1959년 서울로 올라갔다.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유영모 선생이 마침 YMCA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농사는 박영호 선생에게 참되게 살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경기도 의왕에서 6 천 평의 농장을 개간해 밭을 일구면서 짬짬이 책을 읽었다. 매주 금요일이면 서울 YMCA로 가서 스승 유영모의 강의를 듣고, 다시 댁으로 찾아가 5년 동안 가르침을 받으면서 세월을 보내었다. 1965년 어느 날 스승은 더 이상 가르쳐 줄 것이 없다면서 ‘단사(斷辭)’라는 말을 꺼내었다. 스승을 떠나 독립해 혼자서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스승의 곁을 떠난 박영호 선생은 5년간 이를 악물고 혼자 다시 공부하였다. 무교회주의적인 입장에서 정신이 지향해 나아갈 방향을 정리한 첫 저서인 『새 시대의 신앙』에서 한국의 기독교가 가야할 길을 제시하였다. 그 무렵 스승 다석 유영모로부터 ‘졸업증서 ― 마침보람’이라 쓰인 봉함엽서를 받았다. 다석 류영모의 참 제자로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다석 유영모는 박영호 선생에게 자신의 전기 집필을 맡겼다. 1971년부터 준비하기 시작한 『다석전기(多夕傳記) 』를 1984년 책으로 출간하였다. 박영호는 스승이 읽은 책을 모두 독파하였다. 그리고 스승이 살아온 이야기를 지인들로부터 직접 구술을 받았다. 스승이 평생 써온 『다석일지(多夕日誌)』를 필사하면서 10년 동안 자료를 수집 재정리하였다. 스승이 돌아가신 1981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13년 만에 스승의 기록을 모두 완성하였다. 그의 끊임없는 스승에 대한 사랑은 스승 알리기에 70평생을 바치었다. 그가 쓴 것으로『진리의 사람 다석 유영모』,『다석 유영모 어록』,『다석 류영모 명상록』,『다석 유영모의 얼의 노래(老子)』등이 있다. 또 문화일보에 다석 사상에 관한 글을 325회 연재한 후 이를 묶어 『다석 사상전집(전5권)』을 간행하였다. 오늘 날 참된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현대인에게 귀감이 될 만한 스승과 제자의 사랑의 이야기이다. 다음은 나의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974년 어느 여름날 <서양문예사조> 강의 첫 시간에 삼십대 초반의 말쑥한 귀공자 타입의 S교수가 강의실에 들어 왔다. 자신의 강의는 세계적인 강의이며 자신에게 받은 학점은 미국의 대학에서나 서울의 연세대학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성적평가 기준이라고 역설하였다. 대구의 지방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미국의 대학에 유학을 가서 받는 수업이라 생각하고 들어야한다고 하였다. 자신의 강의는 세계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명강의(名講義)이기 때문에 결강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다음 수업부터는 반드시 강의계획서에 명시된 작품을 읽고 강의를 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학생들은 여기저기서 수근 거리기 시작하였다.

" 뭐 저런 선생이 있는거야?"

대학생활을 시작하고 적당히 놀면서 낭만을 즐기고 있는 때인데, 왠 날벼락인가? 그 당시 K대학은 지방의 삼류대학이어서 대학에 다니면서도 열등감에 휩싸여있었던 우리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단테의 『신곡(神曲)』을 읽고 수업에 참가하라는 일방적인 선언을 하고 그 날 수업은 끝났다. 우리들은 단테의 『신곡』이라는 생전처음 들어보는 서양 명작고전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 책은 몇 권 밖에 없어 수강생 모두가 보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였다. 마침 나는 운 좋게 책을 빌릴 수 있어 구석구석까지 읽고 수업에 임하였다. 수업시간이 되자 단테의 『신곡』을 읽지 않고 온 사람은 모두 나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강의실 반 틈의 남녀학생들이 우르르 나가버렸다. 몇몇 여학생은 설마 쫒아내기야 할까? 하고 엉덩이를 밍기적 밍기적 하면서 눌러앉아 있었다. 스승의 해박한 지식은 혀를 내둘릴 정도이었으며 재미있게 강의를 이어 나갔다. 책을 읽지 않고 수업에 참가하였던 여학생들은 강의 중간 중간 스승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 계속 창피를 주어 더 이상 부끄러워 책상에 앉아 있을 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쪽지 시험은 고등학교의 수업형식에 익숙해 있었던 우리에게 대학공부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 우리들은 재수생의 열등감과 삼류대학에 다니는 부끄러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스승의 수업을 들으면서 세계 속의 대학생으로 거듭나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자신의 가능성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는 지방의 삼류대학인 K대학을 나와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그리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 박사학위를 받거나 유학을 다녀와 스승과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친구들도 많이 있다. 스승의 강한 하드트레이닝이 오늘의 자기를 만들었다는 자긍심에 매년 스승의 날이면 잊지 않고 스승을 찾아 문안 인사를 드리고 있다.

요즈음 참된 스승의 길을 포기하고 월급쟁이 생활을 하는 교사들을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돈을 받은 만큼 단순히 지식을 파는 근로자로 전락해버린 선생님들을 보면서 우리 교육계의 암담한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참된 스승을 만나지 못하는 요즈음의 학생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대학시절 학점을 쉽게 주는 과목을 찾아 수강신청을 하는 학생들을 볼 때면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업그레이드 시키고자 한다면 학점을 어렵게 주시는 과목교수에게 도전하여 A+학점을 취득한다면 얼마나 보람찬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과목을 찾아 대학성적표를 관리한다면 참된 스승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성장의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스승의 날이 엄연히 달력에 있지만 이를 지키기보다 교육청과 학교에서는 당일을 휴업하는 현실이다. 참된 스승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우리의 교육계가 되었으면 한다. 교육은 참된 인간을 만들어가는 신성한 일이다. 무지에서 앎을 깨달아 건전한 시민으로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깨우쳐주는 스승이 그리운 계절이다.

학교를 다닐 때야 숙제하듯이 선생님에게 편지를 쓰고 꽃을 달아드리느라 분주했지만, 막상 졸업을 한 후 그 분들 가운데 기억나는 스승이 마땅히 없다면, 그것이 선생님들만의 불행일까? 학교를 무려 20년을 넘게 다녔는데, 다시 찾아뵙고 싶은 스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면 그야말로 살아가기 불안하고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스승이란 삶에 필요한 지혜를 가르쳐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불안하고 어른들도 불안한 시대, 우리 가슴에 오롯이 떠오르는 한 분의 스승이 없다는 것은 진정 가슴 아픈 일이다. 스승이 없다는 것은 내가 더 잘 살아가도록 방도를 충분히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불행이 아닐까?

박영호, 多夕 柳永模 명상록: 진리와 참 나, 서울: 두레, 2000 

청구기호 : 158.12박영호ㄷ <4층 인문과학자료료실 보존>

(704-701) 대구광역시 달서구 신당동 1000번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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