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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9호(5월)

[고문헌산책 14]왕지

[고문헌 산책] 조선 초기 관직 임용장, 왕지

 

조선 초기에 임금이 내린 관직 임용장을 왕지(王旨)라 합니다. 이 왕지가 조선 후기에 족보에 수록된 사례를 소개합니다. 

교지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왕지라는 말은 익숙하지 않다. 둘 다 같은 말인데, 세종 때부터 교지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교지는 알아보기 쉬운 해서로 작성을 했지만, 왕지는 흘려서 쓴 행서로 작성이 되어 있어 읽기가 어렵다. 교지는 임금이 내린 문서를 말한다. 주로 과거 합격증, 관직 임용장으로 인식되는 문서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왕지는 특이하다. 원본이 아니라 <광주안씨족보>에 원본 글씨체로 판각되어 맨 앞에 수록된 것이다. 동산도서관에 있는 1790년과 1867년 족보에 동일하게 수록되어 있다. 광주 안씨 선조의 관직 임용장이 족보에 수록되어 있은 것이다.

문서 내용은 영락12년(1414)에 안성을 강원도관찰사로 임명한다는 내용으로 원본과 똑같이 베껴 써서 목판에 새겨 족보에 수록하였다.

 그러면 광주 안씨 문중에서는 왜 조상이 받은 관직 임용장을 족보에 그것도 맨 앞장에 수록한 것일까? 가문의 역사가 오래되었고, 높은 관직을 받은 조상을 내세우기 위해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하나 정도는 있어야 기록의 나라로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족보는 한 가문의 역사이다. 족보는 시조로부터 내려오는 후손들의 가계도가 수록되어 뿌리를 알게 하기도 하고, 같은 뿌리에서 태어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과의 관계를 알게 하여 동족 의식을 갖게 해 준다. 한편, 족보에는 가계도 이외에도, 가문의 역사에 신빙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집안 역사 자료를 수록하기도 한다. 모두 가문을 드러내고 높이기 위함이다.

 족보 편성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전에 간행된 족보의 서문과 발문 등을 수록하기도 하고, 국왕이 내린 글씨, 국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공신녹권 등 각종 문서, 집안 재산 상속 문서 등 집안의 자랑스러운 역사 자료는 가능하면 많이 수록한다. 그래야 집안의 역사가 오래되었고, 인물이 많았음을 대내외로 알릴 수 있는 것이다. 집안의 역사를 묶어 흔히 <문헌록>이라는 별도의 부록으로 족보에 첨부하는 경우도 많다.

 광주 안씨 가문에서는 1393년(태조 2)에 청백리에 선발되었던 안성(安省)이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면서 받은 문서를 수록하면서 집안의 역사를 높이고 인물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이 문서가 족보에 수록된 것은 1739년이다. 족보에는 후손인 생원 안택명(1683-?)이 문서를 족보에 첨부하게 된 것에 대하여 쓴 글(1739)이 있다. 여기에는 '태종이 직접 교지를 써서 내렸다.'고 적고 있다. 후손의 말이 사실이라면, 태종의 글씨가 되겠는데, 사실 여부는 검증하기 어렵다.

 원본 문서는 1752년(영조 27)에 세운 어필각(전남 장수군)에 전하고 있다고 한다. 1414년에 받은 임명장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왔다는 것이 놀랍고, 이를 족보에 새겨 넣어 지금까지 전하게 한 후손 덕에 그 모습을 알 수 있어 반갑다.

 

<편집위원: 최경훈, 학술정보서비스팀 고문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