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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42호(3월)

[고문헌 산책 20] 정해알성문무과방목

  “영조의 성균관 입학 45주년을 기념해 특별히 시험을 치르다” 

  1767년 9월 18일 실시된 특별 시험의 합격자 명부, 

  영조는 조선의 제21대 국왕이며, 가장 오랜 기간인 52년 동안 국왕의 자리에 있었다. 사도세자,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왕, 인권을 중시한 국왕 등 다양한 수식어를 가지고 있다. 신분이 미천했던 후궁에게서 태어난 그는 원래 왕이 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런데,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 자식이 없고 허약했기 때문에, 경종의 반대편에 있던 노론의 지지에 힘입어 우여곡절 끝에 후계자인 왕세제(왕의 아우로서 보위를 물려받을 사람)로 책봉되었다. 

  왕세제 책봉. 
  바로 왕의 후계자로 공식 인정되었다는 의미. 왕이 될 수 없었던 운명에서 왕이 될 운명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1722년 9월 18일, 29세의 영조는 국왕이 된다는 왕세제의 신분으로 성균관에서 입학례를 행하였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정부의 중앙교육기관으로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유학을 교육하는 상징적인 기관으로, 왕세제로서 이곳에 입학하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장차 국왕이 될 사람이 나라의 근간인 유학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따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상징적인 의식이었다.

  그리고 1724년 이복 형이었던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결국 왕이 되었다. 1722년에 영조가 왕세제로서 입학례를 행하고 45년이 지난 1767년 9월 18일. 자신이 45년 전에 왕세제로 성균관에서 입학의 의식을 행했던 바로 그 날에 영조는 74세의 나이로 16세의 세손(정조)을 데리고 다시 성균관을 찾아 공자의 위패에 잔을 올렸다.

  영조는 그 자리에서 45년 전 바로 그날 자신의 성균관 입학을 회상하였고, 마침 자신을 이어 국왕이 될 세손(정조)과 함께 한 기쁨을 표현하고자 특별 과거 시험을 실시하였다.

  이번에 소개하는 책은 바로 그런 사연으로 특별히 실시되었던 시험의 합격자 명부이다.

 

문과 합격자 명단 시작 부분

  이 합격자 명부에는 시험에 참여했던 31명의 시험관 명단, 시험 문제, 김광묵 등 문과 합격자 10명과 김취선 등 무과 합격자 301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험은 창경궁 후원의 춘당대에서 실시되었고, 영조가 직접 “서민자래(庶民子來)”라는 문제를 출제하였다. 시험 문제는 ‘백성들이 어버이를 돕는 자식처럼 와서 일을 도왔다’는 뜻으로, 성군으로 알려진 중국 주나라 문왕이 하는 일은 시키지 않아도 백성들이 자식처럼 도왔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백성이 어버이처럼 믿고 따르는 성군이 되고자 했던 영조의 바람이 담은 시험 문제가 아니었을까?

  52년의 재위 기간. 
  83세로 세상을 떠난 영조는 80세에 자신의 치적을 <어제문업(御製問業)>에 6가지로 적었다. 
바로 탕평책, 균역법, 청계전 준설, 옛 제도 회복, 서얼의 벼슬길 허용, 경국대전의 법 정신 회복을 말한다. 
<어제문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팔순이 되도록 한 사업이 뭐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마음속으로 가만히 부끄러워 그 어떻게 대답할까?
      첫째는 탕평이나 부끄럽구나 그 두 글자.
      둘째는 균역이니 혜택이 승려에까지 미쳤네
      셋째는 준천이니 가히 만세토록 드리울 것이며
      넷째는 옛 제도의 회복이니 여종이 모두 한가롭구나
      다섯째는 서얼 벼슬길 허용이니 유자광 이후 처음이네
      여섯째는 어제의 정치이니 바로 경국대전의 법이라네"

  이번 고문헌 산책에서는 신입생의 합격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영조가 왕세제로서 성균관에서 입학의 의식을 행한 날을 기념하여 특별히 실시된 과거 시험 합격자 명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편집위원: 최경훈, 학술정보서비스팀 고문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