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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42호(3월)

[북~ing] 장벽을 넘어 해방으로, 여성 독립운동가의 생애

  독립운동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여성이 독립운동에 나서기 위해서는 더 험난한 길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이 다양한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여학생도 있었고, 교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도 있었고, 주부도, 기생도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여성들이 3.1운동, 광주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많은 민족운동 일선에서 활약했다. 

 

▣ 여성 십대 순국자 : 유관순

 

  유관순(柳寬順) 횃불 되어 타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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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간과하지 않겠다 : 한국 독립을 위한 십대 순국자(OVERLOOKED NO MORE: A TEENAGE MARTYR FOR KOREAN INDEPENDENCE)” 

  2018년 3월 29일자 미국 뉴욕타임즈(인터넷 판)는 이 같은 제하의 부고 기사를 1면 머리기사로 내보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1년 앞둔 시점이었다. 이 기사로 유관순 열사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한국의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2019년 1월 미국 뉴욕주의회는 유관순 열사를 기리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3월 1일을 ‘3.1운동의 날’로 정했고 뉴욕주 나소카운티도 2020년부터 3월 1일을 '3.1운동의 날'로 정하고 ‘유관순상’을 제정하기로 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16~18세 여고생을 대상으로 유관순 전기 독후감을 접수해 리더십과 희생정신 등을 기준으로 수상자를 선정한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유관순 열사의 서훈을 1등급인 '대한민국장'으로 승격하는 등 유관순 열사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있었다. 

 

항거 : 유관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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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많다. 보고 난 후 찜찜함이 감도는 작품도 많았다. 일본의 침략, 그리고 지배는 분열된 민족과 무능한 권력층 탓이라는 인식은 가슴 아팠던 역사를 더욱 암울하게 했다. 하지만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는 그런 불편함을 완전이 걷어냈다. 

  '항거'는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후 1년의 이야기를 다뤘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재학 중 1919년 3월 1일 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고향 병천(충남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 운동을 주도해 벌이다 수감됐다. 교과서엔 "갖은 고문 끝에 옥중 사망했다"는 한 줄의 이야기를 '항거'는 105분의 러닝타임 동안 담담하게 풀어냈다.  19193.1 만세운동 후 3평도 안 되는 서대문감옥 8호실 내 영혼만은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유관순과 8호실 여성들의 1년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 여성 노동투사, 최초의 고공 농성 투사 : 강주룡

 

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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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강주룡의 삶과 죽음  : 『동광』 23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강주룡은 자신의 삶도 간략히 소개한다.

  평북 강계 출신이었으며 아버지를 따라 서간도로 이주하여 지내다가 스무 살에 통화현에 거주하는 최전빈과 결혼했다. 다섯 살 연하였던 남편은 “아주 귀여운 사람 사랑스러운 사람”이었고, 부부는 다정하게 지냈다. 아마도 강주룡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결혼한 지 1년, 16살의 남편이 독립군에 가담한 것이다. 인터뷰에서는 “OO단 수령 백광운(白狂雲) 씨의 제2중대”라고 했는데, 백광운은 대한통의부 1중대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 참의장을 역임한 채찬(蔡燦)의 가명이다. 강주룡은 남편과 같이 독립군 부대에 참여했다가 집에 가있으라는 남편의 명에 따랐다. 몇 달 후 남편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기까지 했으나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7세 소년 군인 최전빈의 죽음과 부인 강주룡의 단지(斷指)는 다른 기록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 자의 기사 「유년 군인(幼年軍人)의 순직(殉職)」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남편의 죽음으로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맥없이 시집으로 돌아갔으나 시집에서는 “남편 죽인 년”이라고 중국 경찰에 고발하여 1주일 동안 죄없이 갇혀 있기도 했다. 결국 서간도서 귀국한 강주룡은 부모와 어린 동생들의 생계를 위해 고무공장 노동자로 취직했다. 남편을 따라 참가한 것이기는 하지만, 독립군에 참가했던 강주룡의 사회적인 의식은, 1930년의 임금 인하와 여기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거치면서 훨씬 확대되었던 듯하다. “안광을 발하는 작은 눈, 매섭게 생긴 코, 그리고 상상 이상의 달변”이 1931년 파업현장을 찾은 기자가 받은 첫인상이었다. 누가 봐도 그녀는 파업현장을 지휘하는 노동운동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거듭된 단식과 무자비한 폭력에 대항하다 지친 몸은 일제 경찰의 무자비한 고문과 수감생활을 버티지 못했다.

  신경쇠약과 심각한 위장 장애는 갈수록 악화되었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932년 6월 4일 강주룡은 병보석으로 출소하여 평양의 빈민가에 있던 집으로 돌아갔다. 동지들이 찾아와 도와줬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1932년 8월 13일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2007년 강주룡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조선의 딸, 총을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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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만세! 그리고 딸들의 만만세!
  '김락, 이화림, 남자현, 정정화, 동풍신, 김마리아, 박자혜, 박차정, 조마리아, 안경신, 권기옥, 부춘화, 김향화, 강주룡, 윤희순, 이병희, 조신성, 김알렉산드라, 오광심, 김명시, 정칠성, 방순희, 이희경, 주세죽....'

  우리는 안중근, 김구, 신채호, 윤봉길, 이봉창의 이름은 알지만 이들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신채호 선생의 아내 박자혜,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도운 백범 김구의 비서 이화림
하지만 그들은 어머니나 아내이기 이전에 이미 ‘치마를 두른’ 독립운동가였다.

  그들은 만주 벌판에서 장총을 들고 직접 일제와 온몸으로 부딪쳤고, 총독을 암살하겠다고 권총을 들고 나섰고, 일제 식민지배의 심장부를 향해 폭탄을 던지고, 비행기를 몰고 가서 일본 왕궁을 직접 폭격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비행사가 되었다. 그뿐인가. 이역만리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피땀 흘려 벌어들인 일당을 기꺼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고, 아버지의 시신을 곁에 두고 벌떡 일어나 목이 터져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독립운동 자금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한밤의 국경을 넘나들고, 국채를 갚기 위해 갖고 있는 소소한 패물들까지 기꺼이 내놓았다.

  탄약을 만들어 제공하고 독립운동가들의 밥을 지어주고 빨래를 해주고 살림을 챙겼다.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기나긴 옥살이를 하면서도, 심지어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는 순간까지도, 그들의 정신을 지배했던 오직 한 가지 생각은 ‘대한 독립’이었다.

 

▣ 여성 교육의 선구자, 독립운동의 맹장 :  조신성

 

서북을 호령한 여성 독립운동가 : 조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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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신성은 ‘여걸’이다. 그는 평생을 여성 민족교육사업에 매진했다. 또한 3ㆍ1운동 직후에는 의열항일운동단체인 맹산독립단의 총참모가 되었다. 

  당시 항일 운동은 주로 남성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조신성은 여성으로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는 남성을 이끌며 군자금 모집, 부일협력자 처단, 일제 식민기관 파괴 등에 앞장섰다. 그의 신념은 불의를 보면 항거해야 하고, 민족이든 개인이든 자유를 얻으려면 정신적ㆍ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는 곧 민족의 독립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대중 속으로 들어가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대중에게 스스로 정신적·경제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을 강조했다. 비록 그가 유년시절은 고아로, 성장해서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과부가 되는 등 인생의 시련을 겪었으나 그의 원칙과 소신은 확고한 신념과 열정의 원동력이 되어 당대의 많은 사람이 그의 뜻을 따르고 숭배했으며 이러한 그의 활동은 조국 독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민족운동, 여성운동사에서 그 중심에 서 있었던 조신성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은 아직까지 밝혀져 있지 않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의 발굴과 함께, 선입관에 의해 재단되었던 한국 근대 여성인물들의 민족운동ㆍ여성운동 참여 동기와 이후에 여성운동사에 끼친 영향 등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서간도에 들꽃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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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여성독립운동가 20: 이윤옥 시집 

가슴에 육혈포, 탄환,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뛴- 조신성

  이 시집에서 시인은 춘천의 여성의병장 윤희순, 임신부의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쓴 남자현, 안동의 독립운동가 3대를 지키고 그 자신 만세운동으로 잡혀가 두 눈을 잃었던 김락 애국지사를 비롯한 스무 명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추모하는 시와 삶의 여정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이윤옥 시인은 이 시집을 내려고 중국의 임시정부 피난길인 상하이, 꽝쩌우, 류쩌우 창사 등지는 물론이고 부산, 나주, 안동, 춘천 등지의 생가나 무덤을 직접 발로 뛰었으며 인천, 수원 등에 생존해 계시는 여성독립운동가를 찾아가 만나 보는 등 현장감 있는 모습을 시집에 담고 있다. 이 시인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서간도의 살을 에는 북풍한설을 견디며 풍찬노숙을 마다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어찌 이들뿐일까? 이 작업은 계속된다.”라고 밝힌다.

  

< 출처: 글, 이미지- 네이버, 국립중앙도서관 > 

편집위원 : 이영숙(학술정보지원팀 수서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