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5/175호(4월)

[고문헌 산책] 덕수이씨족보

「덕수이씨족보」, 율곡 이이 집안의 첫 번째 간행 족보 

대한민국 화폐의 주인공 4명은 모두 조선시대 사람들이며 그 가운데 3명이 덕수 이 씨와 관련이 있다.
오천 원권에 율곡 이이, 백 원권에 충무공 이순신, 오만 원권에 율곡 이이의 어머니가 되는 신사임당이 있다.
우리는 『덕수이씨족보』에서 이 세 사람을 모두 만날 수 있다.

『덕수이씨족보』는 생각보다 늦은 시기인 1713년(숙종 39)에 처음 간행되었는데 명망 높은 가문의 족보가 16~17세기에 간행된 것을 감안하면 18세기는 늦은 감이 있었다. 
족보를 간행한 사람은 경상감사 이탄(1669~1718)이었다.  그는 아버지 이희무(1649~1708)가 족보의 편성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그 뜻을 이어 상중(喪中)에 편성하였고, 이여(李畬) 등 집안 어른께 여쭈어 완성하였다.  마침 자신이 1712년 경상감사로 부임하게 되었고, 부임하자마자 즉시 간행하였다.

이 족보는 조선 후기 족보로 3월에 소개한 1600년 간행의 『진성이씨족보』와 차이를 보인다. 우선, 조선후기 족보이므로 자녀를 출생 순서가 아니라 남자를 먼저 수록하였고,  사위를 표기하고 그 자녀인 손자녀는 사위의 이름 옆에 간략히 기재하였다.  조선 전기에 아들딸 구분 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수록하고 외손도 무한정 표기하던 방식과는 대조적이다.

우선, 오만 원권의 주인공 신사임당이 족보에 어떻게 실려 있는지부터 보자!

신사임당에 대한 기록은 남편 이원수 항목에 기재되어 있다. 신사임당 기록 부분에는 이름은 없고,  “평산 신씨이며, 아버지는 진사 신명화, 좌의정을 지낸 문희공 신계(申槩)의 현손(녀)이다. 무덤은 파주 두문리 자하산에 있다.”라 적혀 있다. 족보에는 딸의 이름 대신에 사위의 이름을, 부인의 이름 대신에 그 부친의 이름을 기재하였다.

 

이원수의 부인으로 기재된 신사임당 부분

 

『덕수이씨족보』 첫 족보에서 눈에 둥그렇게 떠지는 곳은 이이(李珥)의 가계 부분이다.
이이의 아들이 ‘첩의 자식’이란 의미로 '첩자(妾子)' 표기되어 있어 눈을 크게 떠 다시 보게 된다.


이이는 결혼한 정실부인에게 자녀가 없었다. 그의 정실부인에 대해서는 “곡산 노씨이며 아버지는 노경린이다. 임진왜란 때 선생(남편)의 무덤 옆에서 순절(殉節)하였는데, 그 일이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고 자녀는 없다.”는 기록만 있다. 이이는 첩에게서 2남 1녀를 두어 족보에는 첩의 자식과 그 후손들이 수록되어 있다. 첩에 대한 정보는 물론 없으며, 자녀의 이름 앞에 첩의 자식이라는 의미로 ‘첩자(妾子)’ 또는 ‘첩녀(妾女)’라 적었다. 이이의 후손들은 서자의 집안이 되었고, 적서를 엄격히 구분했던 조선시대에 크게 힘쓰지 못하는 집안으로 전락하는 배경이 되었다.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는 '적실과 첩에게 모두 아들이 없을 때 양자를 들일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적실의 아들이 없고 첩의 아들이 있을 경우, 그 집안은 서자의 집안으로 전락하게 되는 엄청난 부담을 준 것이다. 이 법을 지켜 이이의 후손은 첩의 자식으로 가계를 이었다. 엄청난 부담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이가 서얼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한 것과 관련 있어 보인다.

대부분의 ‘다른 가문처럼 첩의 자식이 있어도 친족에게서 양자를 들여 서자 집안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면 되었을 것인데’라는 생각이 든다. 헌법인 『경국대전』에서는 금지하였지만, 법을 지키지 않고 양자를 들이는 경우가 증가하면서 논쟁이 이루어졌고, 결국 첩에게 아들이 있더라도 장자의 경우에 양자를 들이는 것이 허용되는 방향으로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이의 후계로 양자를 들이지 않고 혈손인 첩의 자식으로 그대로 대를 이었음을 족보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경국대전』을 따르지 않고 양자를 들였다면, 서자 집안으로 전락하여 가문이 쇠퇴하는 불이익은 없었을 것인데, 족보를 통하여 서자로 후손을 이은 것을 보면서 지금 다시 『경국대전』을 준수한 그와 그 집안을 보게 만든다. 이이의 가족 묘소는 파주에 있으며, 그 일대는  <율곡선생유적지>로 관리되고 있다.

 

> 편집위원: 최경훈 사서, 학술정보서비스팀 고문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