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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74호(3월)

[고문헌 산책] 진성이씨 족보(대구시 유형문화유산)

「진성이씨 족보」 퇴계 이황 집안의 첫 번째 간행 족보 


"모든 책에는 탄생의 이유가 있다." 
책을 찍어내는 출판 비용보다 수요와 출판의 효과가 훨씬 높을 때다. 출판이 쉽지 않았던 시기에는 그 정도가 더욱 그랬다. 한 집안의 혈연관계를 수록한 족보는 당시의 수요가 반영된 대표적 주제의 하나였다. 족보의 출판은 15세기부터 시작되었고, 19세기에 급증하여 모든 양반 문중에서 족보를 간행하여 뿌리와 혈연관계를 이해, 공유하려고 하였다. 족보는 누구나 가지려고 했던 조선 사회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진성이씨 족보(眞城李氏 族譜)


이번에 소개하는 족보는 1600년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간행된 『진성이씨 족보』이며, 이황의 증조할아버지 이정(李禎)의 아홉 자녀(3남 6녀)의 후손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족보는 대학자였던 퇴계 이황의 『퇴계선생문집』이 간행되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손자 이안도와 문인 조목 등을 중심으로 문집이  도산서원에서 간행된 후에 목판이 조금 남았고, 목판에 글자를 새기는 각수 등 기술자가 도산서원에 머무는 상황이라는 판각의 기반이 마련된 상황이었다.

집안의 뿌리가 수록된 계보였던 만큼 퇴계 이황의 손자 이안도(1541~1584)가 일을 주관하고, 이정회·이형남 등이 교정과 감독의 일을 맡는 등 집안사람들이 비용을 모았으며, 효제(孝悌)를 강조한 스승의 집안 족보를 간행하고자 한 조목 등 문인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초기 족보인 만큼 후손의 기술 방식이 조선 후기와는 차이를 보인다. 즉, 남녀 출생 순서대로 후손을 수록하거나 본손(부계) 이외에 외손(모계)의 가계까지 수록하는 조선 전기 남녀평등의 인식을 보여준다.

아래 그림은 이황의 가계가 기재된 부분이다. 아들을 먼저 기재하고 딸은 뒤에 기재하거나 외손은 사위까지만 한정적으로 기재하는 조선 후기의 족보 기재 방식과는 다른 모습이다.

가로 방향 5칸으로 편집되어 있는데, 한 칸은 한 세대를 의미하고 같은 칸은 같은 세대를 말한다. 
족보는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의 순서로 보면 된다. 

 왼쪽에 우리가 잘 아는 이황이 있다.  바로 위 칸에서 오른쪽으로 가다가 만나는 이식(李埴)이 아버지또 위 칸에서 오른쪽으로 가다가 만나는 이계양(李繼陽)이 할아버지또 바로 위 칸에 있는 이정(李禎)이 증조할아버지다.

할아버지를 기준으로 보면, 자녀로 딸이 먼저 2명 기재되어 있다. (아들은 아들 자(子), 딸은 여자 여(女)라 쓰고 그 아래에 각각 아들, 사위의 이름을 적었다)
둘째 사위 김신(金伸)에게는 딸만 하나 있었는데, 사위 이름은 금원복(琴元福)이고,  금원복 아래에 자녀가 딸·딸·아들·딸의 4남매가 아들딸 구분 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다.  또한 외손도 본손과 동일하게 무한정 기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조선 후기에는 아들 먼저 다 기록하고, 딸은 나중에 기록했고, 외손은 대체로 사위만 기록하였다)


할아버지 이계양의 셋째 자녀이자 첫째 아들이 이황의 아버지가 되는 이식(李埴)이다. 그에게는 6남 1녀의 자녀(7남매)가 있었고, 그 가운데 7번째 막내아들이 이황이다.

이 족보는 1600년 간행된 초기 족보로 이보다 앞서 간행된 족보는 『안동권씨 족보』(1476), 『문화류씨 족보』(1562), 『강릉김씨 족보』(1565), 『능성구씨 족보』(1576)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희귀본에 속한다.

이황의 가문인 진성 이씨 집안의 첫 번째 족보로 초기 족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자료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어 2024년 대구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편집위원: 최경훈 사서, 학술정보서비스팀 고문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