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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62호(9월)

[고문헌 산책] 조목의 장서인

“퇴계 이황의 문인, 월천 조목의 장서인

 
옛날 책, 고서를 보면,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도장을 ‘장서에 찍는 도장’이라고 하여 ‘장서인(藏書印)’이라고 부른다.

이번에 소개하는 장서인은 조목(趙穆, 1524~1606)이 사용한 것이다.

조목의 도장은 『추강집』, 『대학혹문』, 『열자권재구의』 등의 책에 찍혀 있다. 바로,
東皐散人(동고산인), 東皐晩補(동고만보), 趙氏穆士敬章(조씨목사경장), 月川書堂(월천서당).

동고산인 월천서당 조씨목사경장

 


‘동고산인’과 ‘동고만보’는 조목의 호(號)이고, 
‘조씨목사경장’은 자신의 성명(姓名)과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붙이는 이름인 자(字)를 합한 것인데,
풀이하면, ‘성은 조, 이름은 목, 자가 사경인 사람의 도장’이다.

‘월천서당’은 자신이 지은 서당의 이름이다.
서당에 자신이 수집한 책을 두었던 것으로, 지금의 ‘사립 학교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조목은 67세 되던 1590년 서당을 수리하고, 늦가을에 ‘서실 중수에 대한 기록〔重修書室記〕’라는 글을 지었다.
이 글은 그의 문집인 『월천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글에서 조목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릴 때부터 책을 아주 좋아하여 책을 사거나, 새로 찍거나, 임금의 하사품으로 받거나, 
친구가 보내주기도 하였는데, 집안 대대로 전해오던 것까지 합하여 대략 1,400권이 되었다."


  
1,400권이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많은 양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책의 출판량이 많지 않았고, 귀했던 조선 전기 기준으로는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그래서,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책 소장자[장서가] 가운데 한사람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1590년 조목이 서당을 수리하고 나서 확인했던 책들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모두 ‘귀중한 책’들이다.
고문헌 귀중본의 기준이 시기적으로는 ‘임진왜란 이전의 책’이니까.

지금 다행히 책에 도장이 찍혀 있어서 ‘월천서당’에 있었던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월천서당’의 책은 동산도서관 이외에도, 고려대, 경북대, 동국대, 도산서원 등 여러 기관에 전한다.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수많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 남아 다행스러운 일이다.

동산도서관에 있는 『추강집』을 보면 책의 끝에 
“萬曆庚寅買(만력경인매) / 東皐散人(동고산인)”이라 적혀 있다.
풀이하면, “1590년 구입 / 동고산인(조목) 씀”이다.

아래 사진의 오른쪽 중간 아래와 표지 이면 책 구입 기록 부분에 
각각 사각형의 ‘동고산인’과 동그란 ‘월천서당’이 찍혀 있다.
조목은 수집한 연도와 방법을 적고 도장을 찍었던 것이다.

『추강집』에 찍힌 도장과 입수 기록


『추강집』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문집이며,
조목이 입수하여 도장을 찍은 이 책은 1577년 경상감영(대구)에서 간행된 초간본이다.

조목은 안동에서 태어나 15세 때 이황의 문인이 되었고, 
29세 때 유교 경전 시험인 생원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이황의 곁에서 학문에 전념하는 한편, 
자신의 호(號)를 붙인 ‘월천서당’을 통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다. 

월천서당은 그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운영한 서당이었다. 
‘월천서당’이란 도장이 찍힌 책은 개인이 수집한 것이지만, 
학생들을 위하여 서당에 비치하였던 도서관의 책으로 볼 수 있다.

월천서당은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에 지금도 남아 있는데, 
후대에 새로 보수된 건물이다. 1982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
    

<편집위원: 최경훈, 학술정보서비스팀 고문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