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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독후감] 책이 불타는 온도, '화씨451'

[독후감] 2011년 동산도서관 가을 페스티벌 「책에 미친 비사 夜」 독후감 대회 각 분야(재학생, 고등학생, 지역주민)에서 대상을 수상한 수상자의 독후감을 싣습니다.[박춘화 bom@kmu.ac.kr]

[재학생부] 장지연 (영어교육과 1학년)

 
여느 때라면 하릴없이 별 의미 없는 우스갯소리를 채팅으로 주고받고, 사람들이 내 글을 읽기 쉽도록 취대한 간추린 한 줄짜리 공개일기를 미니홈피에 쓰고 있었을 금요일 밤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학교에서 책 읽기 행사에 참여하는 날이라 유례없는 시간에 도서관으로 향했다. 막연히 책의 가치를 높이 생각하고 책을 읽으며 좋은 문장들을 곱씹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다른 어떤 것들에 순위가 밀려 늘 미루게 되는 책 읽기. 이번에는 한번쯤 책 읽기에 우선순위를 매겨 주고 싶어 반가운 마음으로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는 정말이지 가슴을 울리게 하는 멋진 책 한권과 만난다. 언뜻 보기에 별로 감흥 없는 제목에 겉표지도 크게 눈길을 끌지 않아 사람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책들 중 하나였다. 늦게 도착한 나는 좁은 선택의 폭에서 이 녀석을 고르게 되었다. ‘화씨 451’이란 책이 불타는 온도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어느 가까운 미래이고, 책 읽는 일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집 안에 책을 소장하고 있는 경우 방화수들이 달려와 책을 불사 지른다. 주인공 몬태그는 10년 동안 책을 불태우는 일을 해 온 어느 방화수이다. 아무도 책을 불태우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으며, 단지 국가의 ‘법’에 따라 죄책감 없이 책을 불사 지르는 광기의 미래 사회이다. 10년 동안 별 생각 없이 책을 태우던 몬태그가 항상 세상에 대해 의문을 품는 어느 소녀를 만나면서 이전에 생각하지 못한 것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소녀는 눈과 귀를 활짝 열고 세상을 몸으로 느끼려고 하며, 과거의 책이 있었던 세상에 대해 궁금해 한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얘기, 알맹이 없는 우스갯소리만 하고 진심으로 상대방을 사귀지 않는다고 말한다. 학교에서는 이미 정해진 지식들을 깔때기에 넣고 일방적으로 학생들의 머리에 주입시킬 뿐이라서 자신은 그런 공부가 재미없어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정말 가정된 미래 사회의 이야기 인가?

  나는 몬태그와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봤다. 우리가 정말로 상대방에게 진지하게 관심을 가진지가 얼마나 되었지? 그건 정말 중요한 일인데 말이다. 한 장 한 장 책을 읽어갈수록 이처럼 머리를 환기시키는 신선한 충격들의 연속이었다. 그 광란의 미래 사회는 참 우리의 것과 흡사했으니까. 하루 종일 집에서 세 벽면에 설치 된 텔레비전 ‘친척’들과 대화하는 몬태그의 아내, 텔레비전들은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지껄이지만 마치 사람처럼 웃음소리도 내고 맞장구도 칠 줄 안다. 몬태그는 아내와 대화한ㄴ 자기 자신 조차도 TV 전기장치 같다고 느낄 지경이다. 그리고 그녀는 늘 귀마개 라디오를 귀에 꽂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말이 잘 안 들린다. 집에 오자마자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켜고,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때나 혼자 할 일이 없을 때면 귀에 꽂은 엠피쓰리 이어폰을 생각해보라. 그녀의 모습은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소녀를 만나 약간의 심경변화를 겪고, 아내를 보며 문득 서글픈 기분을 느끼던 몬태그는 어느 날 결정적으로 책과 함께 분신자살을 하는 어떤 여자를 보고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책에 대해 궁금해 하게 되어 책을 훔치게 이른다. 점점 책을 훌륭하게 여기는 소수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 그는 책의 엄청난 가치를 확인하게 되고, 책을 지키는 사람들의 힘겨운 대열에 참여하게 된다. 책을 금지하는 이유에 대해 이 사회는 이렇게 설명한다.

  책은 사람들이 골치 아픈 생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사물에 대해 ‘왜?’라고 질문하게 마들고, 상반되는 어떤 것에 대해 고뇌하게 한다. 그 속에는 실제로 별 쓸모도 없는 무거운 내용의 철학이 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 텔레비전 프로 쇼핑이라 즐기는 것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은 사실 죽음을 의미하는 조용함이 아닐까?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살고,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는 세상. 겉으로는 화려하고 알록달록 하지만 생명력이라곤 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세상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란 그런 것이라고, 지금 우리들의 현실이 그러하다고 ‘화씨 451’은 강한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문학가의 강연에서 그가 시인, 소설가에 대해 내린 정의가 떠올랐다. 우리가 만약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친 곳을 치료 할 수가 없어서 죽게 된다고. 이처럼 무감각이라는 건 무서운 것인데, 시인과 소설가는 썩어 가는 세상 속에서 보다 일찍 아파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책이 사라져 가는 세상에 대한 브래드 베리의 진통을 전해 받은 셈이다.

  사실 우리는 눈과 귀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그 모든 편리한 장비들이 갖추어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무엇 하나 모자랄 게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마음 한 구속이 계속 공허한 이유, 무언가 빠져있는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지. 우리는 왜 이런 즐거운 세상 속에서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지를 이 책은 우리가 책고 멀리 있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사람들과 신나게 떠들고 돌아와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는 순간 늘 무언가 허무하고 갈증이 나는 건, 바깥세상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은 질이 떨어지며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짜임새가 있어 책장 하나하나가 진실한 삶의 이야기이며 뚜렷하고 세밀하다. 알맹이가 있는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의 마음은 공허하지 않다.

  짤막짤막한 글과 농담 따먹기로 여느 때처럼 보냈더라면 언제나처럼 갈증 나는 기분에 잔뜩 우울했을 금요일 밤에 이렇게 책을 읽으니 마음이 편안한 것처럼. 그리고 책은 읽는 사람들에게 여유를 선사한다. 언제나 뭔가 즐기지 않거나 일하지 않으면 불안한 우리는 사실 마음의 여유가 거의 없다. 책을 읽는 사람은 그것을 읽다가 잠시 덮어두고 잠깐 생각에 잠길 수도 있고 문장의 의미를 곱씹으며 마음을 울리는 감동의 진동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한 것들은 현실 속에서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여유이며, 우리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흔히들 여유가 있어야 책을 읽지 라고 말하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을 읽음으로써 진정한 여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호젓하게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밤을 새워 책을 읽으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여유야말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정말로 와 닿는 상황에서 알맞은 책을 읽은 것 같다.

  책을 읽는 것은 사실 스스로를 위한 것이니 그렇게 대단하게 유세부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이렇게 시간을 내서 책을 읽는 행사가 주목을 받으며, 사진기가 참가자들을 찍어대는 것은 그만큼 책 읽는 사람이 드문 우리 사회 모습의 반증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불사 지르고 머리 아픈 건 생각하지 않으며,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화씨451’속의 사람들과 우리가 다른 것이 무엇일까.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은 단순히 쾌락을 쫓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어 스스로 사고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책 읽기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밀고 늘 가벼운 잡담과 오락거리에 집중해 왔던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 책이었다. 여느 때의 소모적인 금요일 밤이 아닌 여유로우면서도 의미 있는 금요일 밤을 보냈다. 책을 읽으러 와서 책의 소중함을 더 깨달아 간다.


[중·고등학생부 대상] 이가인 (경일여자고등학교 2학년)

  나는 언젠가 어려운 철학책들을 옆구리에 잔뜩 끼고 다닌 적이 있었다. 예로 들자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가 그 중 하나였는데, 돌이켜 보면 사실 온전히 이해가 되는 텍스트는 거의 없었다. 어떠한 문장은 아무리 곱씹어서 삼켜도 소화가 되지 않아서 속이 거북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책을 줄곧 끼고 다녔다.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만방에 알리고 싶은 나만의 자만심이 그렇게 표출된 것이다. 이러하다 보니, 읽지도 못하고 쌓아두는 어려운 책들이 자꾸만 늘어갔다. 더 큰 문제는 철학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철학적 사유는 여전히 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자 철학에 가졌던 나의 막연한 동경심도 점차 사그라들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다 읽지도 못할 철학책을 집어 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책을 선택하면서, 나는 일말의 기대에 찼으리라, ‘이 작고 두꺼운 것이 나의 지적 허영심을 채워줄지도 모른다.’ 또한, ‘나의 정신적 자만심을 이로써 증명해내리라’는 좀 어리석은 바람도 일부 있었을 것이다. 아니, 확실히 그것이었다. 여태동안 난 철학을 사랑하는 ‘척’했던 것이니라....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그동안의 나의 행동은 부끄럽게 와 닿았다. 더욱 진정성을 가지고서 철학을 사랑해볼 냥으로 나는 새로이 마음을 다져야 했다. 나를 철학의 길로 이끌어 줄 새로운 셀파는 “철학의 숲, 길을 묻다.”였다. 이는 네이버 캐스트에 연재된 ‘철학의 숲’을 활자로 엮어낸 책이었다. 매번 그랬듯이, 나는 먼저 책을 쥐고 가만히 훑어본다. “철학의 숲, 길을 묻다” 문자 그대로 철학의 숲에서 길을 묻는 댄다. 길을 ‘잃다’도 아니고, ‘찾다’도 아니다. 길을 ‘묻다’이다. 무엇보다도 철학의 숲의 길에서는 질문을 던진, 즉, 묻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그리고 숲길을 찾는 것, 다시 말해 종착점까지 도달하는 것은 독자 스스로에게 맡긴다는 얘기일 것이다. 시선은 제목에서 표지로 미끄러져 내린다. 시중에 나와 있는 철학책치고는 거부감이 들지 않게끔 잘 디자인 해 놓았다. 이로써 철학책과 독자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이질감은 최소화한 셈이다. 책을 펴자, 가장 먼저 활자가 눈에 들어와 박힌다. 보기 편토록 적당히 넓고 큰 것이 단박에 읽힌다. 책의 목차를 훑어보니, 프롤로그에는 친절하게도 ‘철학의 숲을 산책하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고, 내용은 크게 고대, 중세, 근대의 3장으로 나누어져 22명의 철학자들을 서술하고 있었다.
 
  나는 책을 읽어나가면서 ‘진리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많은 철학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지금 진리의 상대성과 관련하여 ‘프로타고라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내가 프로차고라스에 관하여 느끼는 아쉬움은 적잖이 컸다. 누구에게나 ‘소크라테스’의 이름은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포로타고라스의 이름을 기억해줄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역사에 길이 남는데 있는 의의는, 그가 철학의 관심을 자연세계에서 인간세계로 이동시킨 데에 있다. 그러나 사실상, 시간 순서로 볼 때 인간세계로의 철학을 먼저 이끈 이는 프로타고라스였으며,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의 원조도 프로타고라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프로타고라스는 역사의 뒷켠으로 사라져 버린 걸까. 그 이유가 바로 ‘상대성’에 있다. 그가 모든 것을 상대적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인류는 그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나는 초반에 철학에서 상대성이 왜 효용 되지 않는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서는 사건의 배경을 전반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사건의 배경아리 함은 사람에 따라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대적인 판단이 개입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 거짓을 가려내야 하는 철학의 영역에서는 상대성은 치명적이었다. 어떤 초월적 기준이나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 이러한 철학은 결국 허무주의와 상대주의를 견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종교, 다양한 인종들이 공존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어떠한 철학적 기준을 가져야 할까? 우리는 이제까지 시대에 부합하는 미덕과 정신을 가져왔다. 중세에는 종교에 의해, 근대에는 이성과 자아로 인한 지배를 받아 덕분에 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기준은 언제나 한계에 다다르기 마련이었다. 산업화와 과학의 발달로 인류는 많은 희생을 치루었고 환경적 파괴도 무시할 수 없는 난점이었다. 우리는 이제 ‘어디로 향해’ ‘어떤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가야할지 정해야할 시점에 있는 것이다.

  책은 저자가 4명이서 공동으로 써내려갔다는 점에서 특이점을 가진다. 자칫 한명의 저자가 철학을 말할 때, 저자의 주관이 지나치게 개입되건, 국한적인 시야를 가질 우려가 있는데, 4명의 저자가 공저한 책이니 만큼 그 단점을 이겨냈다 할 수 있겠다. 책을 읽는 동안 불편했던 점은 페이지 수 옆에 적히는 꼬리말에 지금 글이 속해 있는 철학자가 누구인지 각주가 달려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300페이지 남짓한 쪽수가 읽기에 그리 많은 분량은 아니었으나, 내가 가지는 많은 사색을 어느 정도 발전시킬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다. 어느 누구는 내게 그것들이 쓸데없는 고민이라 하였고, 누군가는 내게 현 생활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뜬 구름 잡는 탁상공론이라고도 하였으나 말을 곱씹고 더 많은 생각을 할수록 생각은 정제되어 갔다.

  사유하는 인간은 모두 철학자라는 말이 있으나, 철학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어렵고 골치 아프다. 좀 더 많은 젊은이들이 철학자들을 동경하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지역주민부 대상] 큰사랑교회도서관 (이영근, 이신승, 김정희 , 류정숙)

  매스컴을 통해 몇 번 보았던 강영우 박사님을 꼭 한번 뵙고 싶었다. 그 이유는 맹인으로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독후감 대회를 통해서 그분의 책속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만나고 배울 수 있어서 너무 기쁘고 감격스럽다. 


  강 박사님은 중학교 때 뜻하지 않게 실명하고 희망이 없어졌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하여 피츠버그에서 박사학위는 받았고 지금은 UN장애위원회 부의장 겸 루즈벨트 재단고문으로 7억 명의 세계장애인의 복리향상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작은 시련과 역경만 닥쳐도 쉽게 낙심하기 쉬운데 어떻게 절망적 상황을 이기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 강 박사님은 그 도전과 헌신의 힘을 7가지로 요약하여 ‘원동력’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자존감과 자신감이다. 우리의 교육은 지력, 체력, 심력의 심력 중 지력이 치우친 면이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력이다. 심력을 통해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지면 공부는 잘 할 수 있게 된다. 박사님의 아들 중 큰 아들 진석이에게 셰익스피어와 생일이 같다는 역할모델로 심력을 주었더니 성적이 크게 향상되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될 때 자존감이 높아진다. 저자도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자존감을 갖게 되었고 꿈을 계속 키울 수 있었다. 특히 친구들과 비교하니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절망했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빛을 발견했다. 맹인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생각이 그를 일으켰던 것이다. 저자와는 다르지만 나 자신도 동료목회자와 비교할 때 개척교회가 너무 직고 힘들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을 깊이 느끼며 다시 일어서서 힘 있게 나아가게 되었다.

 
두 번째 원동력은 선명한 비전과 목표다. 한순가에 맹인 고아가 된 저자는 절망이었으나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비전이 있음을 확신하고 인생 30년을 단․중․장기 계획을 수립하고 매진하여 꿈을 성취했다. 첫째 아들 진석이는 아빠의 눈을 고치겠다고 선명한 비전으로 안과의사가 되었고 둘째 아들 김영이는 학교 숙제로 인생 로드맵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선명한 목표를 세우고 32세에 백악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세 번째의 원동력은 바로 긍정적인 마음이다. 저자는 자녀에게 긍정적인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불을 끄고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맹인인 아빠고 정상인보다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심어 주었더니 그것이 긍정적 마음으로 작용하여 진석이는 하버드에 들어갈 수 있었다. 또 맹인인 아빠도 성공할 수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자녀들은 더 큰 꿈을 가질 수 있었다.

  네 번째의 원동력은 소통이다. 영어로 Compassion인데 남의 고통이나 고난에 동참하고 공감하는 마음이다. 두 아들은 기독교계 아동센터를 통해서 성경동화를 배우며 고귀한 공감의 가치를 얻게 되었다.

  다섯 번째는 소통의 능력이다. 저자의 소통법은 가치관을 통한 소통을 강조한다. 즉,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면서 가치관과 태도가 소통된다고 한다. 특히 발달단계 별 소통의 방법은 이 책에서 제기하고 있다.

  여섯 번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이다. 저자는 시각장애인이 되어 학교도, 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점자를 통해서 5년 늦게 공부할 수 있었고 연세대에서 조차 맹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지만 지인을 통해서 극복하였고 동아리에 들어 갈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독서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고, 유학에도 장애가 결격사유가 되었으나 문교부 청원하여 해결하였다. 끊임없는 도전과 끈기로 그 힘든 과정을 넘어서서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일곱 번째는 창의력과 집중력이다. 저자는 맹인으로서 정상인보다 많은 제약이 있었으나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집중력이었다. 또한 저자는 창의적인 생각으로 루즈벨트 장애인상을 제안하고 이어서 한국이 그 장애인 상을 받게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7가지 원동력이 오늘의 강영우 박사가 세계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고 모든 사람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와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힘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7가지 원동력이 원동력이 되게 한 것은 바로 신앙이었다. 창조주가 나는 사랑한다고 믿음이 진정한 원동력이며 7가지 원동력의 원동력임을 말해 준다.

  이 책을 대하면서 진정 어렵고 넘기 힘든 상황이라도 이 책에서 말하는 원동력과 가질 수 있다면 반드시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내가 처한 상황, 교회가 힘들지만 진정한 원동력인 믿음 안에서 다시 한 번 일어서서 끝까지 달려갈 일이 기대가 된다. 끝으로 강영우 박사의 끊임없는 도전과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