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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독후감] 통섭의 식탁을 읽고

[내가 쓰는 독후감] 웹진 47호에는 2012학년도 1학기에 활동 중인 6기 독서토론클럽의 학생들의 독후감을 선별하여 싣습니다. [조용수 jys0110@gw.kmu.ac.kr ]

 

통섭의 식탁을 읽고

시각디자인과 배진솔

 

 통섭. 나에겐 익숙지 않은 단어였다. 사물에 널리 통함. 서로 사귀어 오감. 인터넷에서 그 뜻을 찾아보고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나에게는 가까이 다가오지도 다가올 수도 없을 것만 같은 분야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제목에 들어가는 통섭이란 생소한 두 글자를 보고 나는 이 책에 대해서 완벽히 오해했던 것이다. 대문이 너무나 무겁고 크게 느껴져 그 안에 들어가기를 꺼렸지만, 막상 안에 들어와 보니 저자는 통섭이란 개념에 대해서 매우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었다. 사실 나는 최재천 교수가 통섭에 대해서 쓴 글이라는 걸 알고 내심 나도 모르게 그를 깔보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책을 받아들고 읽을 준비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책 한 권에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어우러지게 담을 수 있겠느냐고 고개를 내저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책이 후반부에 다다르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400여 페이지에 불과한 이 알록달록한 그림동화 같아 보이는 책 한 권에는 실로 온갖 세상 만물이 다 버무려져 있었던 것이다.  통섭에 대한 개념을 요리에 빗대어 편식하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참 흥미롭게도 비싼 레스토랑에서 코스요리를 먹듯 그 코스에 맞춰서 진행되고 있었다. 동물과 인간의 교감에서부터 요리, 인생, 유전학, 윤리적인 문제 등 수많은 주제와 내가 전혀 모르는 새로운 개념까지 이 책에는 정말이지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마치 나는 5,000원짜리 백반을 하나 시켰는데 수십 가지의 반찬이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그 짧은 식사시간 안에 근사한 후식까지 내주었다. 관련 도서 추천이 바로 그것이다. 보통 어떤 책을 읽고 그 책의 내용에 흥미가 생겼다가도 거기서 그치기 마련인데 그의 도서 추천은 나의 그 흥미를 이어가게 해 주었다. 

 이 책은 주제가 통섭인 만큼 내 두뇌 회전을 굉장히 빠르게 만들었다. 너무나 많은 생각이 떠올랐고 한 번에 많은 깨달음을 얻었기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한 쪽에만 치우쳐 살고 있었구나. 특히 나는 예비 디자이너라는 명목 아래 은근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너무 한쪽에만 치우쳐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견해임에 주의를 필요로 하지만 그래도 나는 당당히 요즘 디자이너들, 그리고 디자인에 관한 내 견해를 얘기해 보고자 한다.

 옛것을 익히고 나아가 새것을 앎. 온고지신. 요즘 디자인 좀 한다는 사람 중 꽤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이다. 요즘 잡지들을 보면 다 다른 상표임에도 그것들의 표지는 약속이나 한 듯 같은 모양을 띠고 있다. 유명인의 얼굴을 크게 박아 놓고 그 주위엔 지루함과 단순함의 경계선에 서 있는 듯한 군더더기 없는 글씨체의 타이핑 몇 개, 그런 디자인에 의도나 담긴 뜻은 전혀 없다. 그저 "Simple is best."만을 떠들어대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스마트한 시대에 사는 스마트한 겁쟁이들에게는 정성이 있고 낭만이 있던 예전의 미술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것만이 스마트한 이 시대에 어울린다고 믿는 그 스마트한 바보들은 옛 그림의 정과 낭만마저도 그저 거치적거리는 찌꺼기로 단정 지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깔끔하고 스마트한 디자인은 좋은 디자인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좋은 디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는 그런 한쪽에만 치우친 촌스러운 발상은 버릴 때가 됐다.

 영화 취화선에서 오원 장승업 선생은 말했다. "붓보다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 아무리 멋들어진 그림이라도 그 안에 담긴 뜻이 없다면 그건 훌륭한 그림이 아니라는 뜻이다. 디자인도 똑같다. 그저 기계로 찍어 낸 유명인의 얼굴에 기계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글씨를 'Simple'이라는 단어로 포장해버리기엔 그건 너무 커다란 실수다. 그건 현대적이고 깔끔한 것이 아니라 의미 없는 단순함이다. 혹자는 이런 의미 없는 디자인을 두고 실속 있고 시원시원해서 좋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날로그적인 옛 그림에는 뜻이 있고 정성이 있고 낭만이 있다. 비록 조금 복잡하고 느릴지 몰라도 나타내는 뜻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네 인생에 데친 것 마냥 넓고 깊은 맛이 있다.

 예술 작품이든 디자인이든 뭐든 그것들에 있어서 품고 있는 뜻이나 의도는 수박의 씨와 같아서 처음에는 없는 것이 보기에 깔끔해 보이고 먹기가 편해 좋게 느껴질지 몰라도 결국엔 근본적으로 있어야 맞는 것이라고 느끼게 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씨 없는 수박은 보통 수박이 종자가 모든 영양분을 섭취하고 남은 것이 과육에 축척 되는 것과는 달리 씨가 영양분을 흡수하지 않고 과육에 모든 영양분이 축적되기 때문에 당도가 높아 맛이 뛰어나다. 하지만 이에 따른 기술적인 문제뿐 아니라 수확기가 늦고 기형과실이 발생하는 등 문제점이 있어 거의 이용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디자인도 현대적인 것만을 고집하여 계속 이렇게 의미 없는 디자인을 한다면 씨 없는 수박과 같은 최후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스마트폰과 원터치, 패스트푸드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요즘 것들의 편리함과 깔끔함만을 생각하여 디자인한다면 그것이 디자인적 편식이 아니고서 무엇이겠는가. 맛이 좋다고 해서 모든 영양소를 고루 섭취하지 못하고 찬란한 아날로그적 감성을 잊지는 말자. 우리가 사랑해 마지아니하는 깔끔하고 편리한 현대적 디자인을 잃고 싶지 않다면 아날로그적인 예술도 잊지 말고 사랑하자. 디자인에서도 우리는 통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디자인에 관한 견해 말고도 이 통섭의 식탁에서 입맛에 맞는 반찬이 있었다. 본문 58페이지에 "가서 말하리라. 그냥 살았노라고. 아니 그냥 살아졌노라고."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아 방심했구나. 애써 숨기며 살았는데 나 자신이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킨 기분이었다. 나는 내 몸의, 영혼의 주체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세상이 정해놓은 외모 지상주의라는 어이없는 틀에 단단히 얽매여 그저 살아지고 있었다. 살이 많은 내 몸을 싫어하는 타인들을 원망하면서도 사실은 난 그 누구보다도 내 외모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 문장을 읽으면서 이제 그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갑작스레 다짐하게 된 건 왜일까. 단지 저 문장이 너무나 감명 깊다는 것만이 그 이유는 아닐 것이다. 아마 나는 사실은 나 자신을 사랑하고 싶었고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럴싸한 핑계를 여기서 찾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제 나는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게 될 테니까. 

 공자의 명언 중 "모든 것이 저만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나 모든 이가 그것을 볼 수는 없느니라." 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저 말은 명언이 아니다. 그냥 당연한 사실이다. 저렇게 당연한 말을 명언으로 만든 것은 바로 우리다. 뭐든지 예쁘고 잘 생겨야 대접받는 현실에서는 사람마다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당연한 진리도 마치 대단한 발견이라도 해낸 듯이 명언으로 칭송받는다. 겉치레를 좋아하는 이 사회는 겉모습이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숨을 쉬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아가게 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진화하고 있다. 그 진화라는 것은 인간의 직립보행이나 곤충의 변태같이 자연스럽고 찬란한 느낌의 것이 아니다. 몸속에 전혀 다른 성질의 무언가를 욱여넣거나 피부에 뭔가를 자꾸만 덧바르는 그런 행위이며 이것들은 때때로 큰 불상사를 낳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이 외모 지상주의의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 외모 지상주의가 싫다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는 우리는 외모를 끔찍이도 중요시하는 또 다른 자신을 마음속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고 있다. 그 내면이 내는 외모 예찬의 커다란 아우성이 소리 없는 아우성에 돌팔매질을 한다.

 우리는 더는 예뻐지려고 잘 생기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본연의 아름다움을 알아봐 주고 사랑해 줄 사람을 찾으면 된다. 그런 사람 하나 찾기에도 인생은 짧다. 모두 똑같은 미를 추구하며 그것을 따라가려고 본연의 개성 있는 아름다움을 묻어버리기에는 그 아름다움은 너무도 찬란하다. 우리는 이미 아름답다. 잉태의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아름다운 존재였고, 태어나는 그 순간 엄청난 아름다움을 동반했고 점점 성장하면서 그 아름다움도 배가 되었다. 물론 예뻐진다면 모두가 그것을 알아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알아주기만 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원래 나의 것이었던 나만의 아름다움이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받아야 마땅하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자신은 아름답지 않다며 불평한다면 그건 정말 아름답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제 진주를 캐낼 줄 알아야 한다. 너의 아름다움을 믿어 의심치 말고 열렬히 사랑하라. 너는 이미 아름다웠고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우며 앞으로도 쭉 아름다울 것이다.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을 살자. 

 책 한 권 읽어 놓고 이렇게 별 얘기를 늘어놓는 것을 보면 누군가는 너무 깊게 들어갔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이 책은 그만큼이나 긍정적 충격을 주었고 편식하던 내 혀를 여기저기 콕콕 찔러 모든 맛을 사랑하게 해주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없는 자취 살림에 생활비를 쪼개고 쪼개 이 책을 구매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글쓰기에 비친 삶의 의미

국어교육과 강미경

 

 누구나 한 번쯤은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소설일 수도 있고, 시일 수도 있고, 수필일 수도 있고, 보고서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글을 잘 쓴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바로 공감(共感)이다. 글을 읽는 사람으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글. 누구나가 원하는 이런 글을 독특한 상상력과 기발한 언어유희로 써내는 이 시대의 유쾌한 작가가 한 명 있다. 바로 이외수다. 이외수 작가는 1946년 경남 함양군에서 태어나 춘천교대를 자퇴한 후 홀로 문학의 길을 걸어왔다. 197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견습어린이들>이 당선되고, 1975년 <세대(世代)>의 문예현상공모에서 중편소설 <훈장>이 신인문학상을 받음으로써 중앙문단에 소설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외수 작가는 이 <글쓰기의 공중부양>이라는 책을 통해 단순히 글쓰기를 통한 공중부양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부양(浮揚)시키는 방법을 글로써 풀어놓고 있다. 이 책의 구성과 상관없이 전체적으로 작가 이외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기본의 중요성과 관점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내용을 전제로 1부 단어의 장부터 4부 명상의 장까지 파트별로 글쓰기의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먼저 1부 단어의 장에서는 우리가 흔히 지나치는 사소한 단어들을 채집하고 단어의 성질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2부 문장의 장에서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법과 문장을 구성하는 방법에 대한 실전적인 문장 비법이 들어있고, 3부 창작의 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소설을 구성하고 쓰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4부 명상의 장에서는 글을 쓸 때 명심해야할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책의 전반에 걸쳐 이외수 작가는 독자들에게 글쓰기에서  ‘기본기에 충실하기’를 바라며 ‘남들과는 다른 관점을 가지기’를 원한다. 만약 우리가 그저 평범한 삶을 살기보다 성공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바로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 두 가지가 해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애플의 한 입 베어 문 사과 모양을 단순한 모양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자 트렌드로 만든 신화적인 존재, 스티브 잡스 또한 기본에 충실하다. 또한, 하나의 사물을 봐도 남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다른 시각에서 그 사물을 관찰하고 평가한다. 그러므로 그가 남들과 달리 부를 얻고 명성을 얻었으며 성공했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첨단 기술은 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세상에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첨단 기술은 다양하다. 예를 들면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촬영한다든가, 컴퓨터로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어 발표하는 등의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이런 첨단 기법을 다 무시해버리고 살아남은, 그리고 앞으로도 건재할 ‘나’를 표현하는 수단은 바로 ‘글’이다. 그렇다면 ‘글’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책의 서두에 이렇게 적고 있다.  “글이란 육신의 쌀이 아닌 정신의 쌀이다. 그것으로 떡을 빚어서 독자들을 배부르게 만들거나 술을 빚어서 독자들을 취하게 만드는 것은 그대의 자유다. 그러나 어떤 음식을 만들든지 부패시키지 말고 발효시키는 일에 유념하라. 부패는 썩는 것이고 발효는 익는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그대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p.7” 글은 그 사람의 인품을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는 글을 쓸 때 가식과 욕심, 허영을 경계해야한다. “허영은 국어사전 그대로 겉치레에 불과하다. 알맹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허영은 자신의 정신적 빈곤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가식이나 욕심과 마찬가지로 문장의 생명력과 설득력을 말살시킨다. p.111”

 이외수 작가가 <글쓰기의 공중부양>에서 풀어놓은 비법들은 비단 글을 쓰는 것에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글이란 곧 우리의 인생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즉, 저자는 이러한 인생의 진리를 글쓰기의 비법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한 번도 가식이나 욕심, 허영을 부려보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남에게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강해지면서 나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바로 이러한 함정에 빠지기 쉽다. 나 또한 어렸을 때 내 욕심만 챙기다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다. 그때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것은 ‘나 혼자 살겠다.’라는 의미와도 같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아마 저자도 이런 깨달음을 주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의 태도나 마음가짐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닐까?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아름답지 않은 것에게 사랑을 느끼는 법이 없다.……심안과 영안으로 볼 때 추악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p.56"
  또한, 저자는 여러 작품을 통해 사안론을 강조했는데 사안론이란, 아름다움을 보는 네 가지의 눈을 말한다. 육안은 얼굴에 붙어 있는 눈이고 뇌안은 두뇌에 들어 있는 눈이며, 심안은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눈이고 영안은 영혼 속에 간직되어 있는 눈이다. 저자는 이 사안 중에서도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 ‘심안’과 ‘영안’을 특히 중요시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몇 명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증오할까? 또, 몇 명의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할까? 저자의 ‘심안’과 ‘영안’에 대한 생각은 바로 모든 성인(聖人)들이 주장했던 참된 인생을 살아가는 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냉정한 두뇌와 차가운 이성으로 사물이나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과 근원적인 순수함을 간직한 영혼으로 사물과 사람을 판단한다면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살 만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글쓰기’의 공중부양. ‘나 자신’의 공중부양. 나는 이 두 가지가 떨어질 수 없는 종이 양면과도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글쓰기를 통해 나 자신을 부양(浮揚)시킬 수도 있고, 혹은 글 쓰는 방법을 통해 나 자신을 부양(浮揚)시킬 수도 있는 것. 이것이 작가 이외수가 이 책을 쓴 의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사진출처: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