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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59호(4월)

[고문헌 산책] 채무일(蔡無逸)의 책도장

중종반정 공신 채무일(1496~1556)의 장서인, “채무일장(蔡無逸章)”


옛날 책, 고서를 보면,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도장을 ‘장서에 찍는 도장’이라고 하여 ‘장서인(藏書印)’이라고 부른다.

장서인은 ‘이 책을 과연 누가 가지고 있었을까?’라는 물음에 답을 줄 수 있다.
그 책의 주인공이 사전에도 나오는 유명한 사람 정도가 되면 그 사람을 만나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게 된다.

보물 제2030호, 『신편유취대동시림』


보물 제2030호로 지정된 『신편유취대동시림』에도 동일인의 도장이 3개 찍혀 있다.
맨 앞장에는 인천세가(仁川世家)와 채무일장(蔡無逸章)이, 마지막 장에는 거경(居敬)이 찍혀 있다. 
‘인천세가’는 인천이라는 본관을 적은 것이고, 
‘채무일장’은 자신의 성명에 도장을 의미하는 장(章)자를 붙인 것이다. 

마지막의 ‘거경’은 자신의 자(字)이다.
‘자’는 남자가 성인이 되면 붙이는 새로운 이름이다.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을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부르는 것을 피하려는 목적과 함께 
한 사람의 삶의 지향점이 담겨있기도 하였다.

‘거경’ 성리학에서 말하는 수양의 방법인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앞부분으로, 
항상 한마음으로 온전히 집중해서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내적 수양의 의미를 담고 있다. 
뒷부분의 ‘궁리’는 이치를 연구한다는 외적 수양을 의미한다. 

채무일은 내적 수양에 더 무게를 둔 모양이다.

『신편유취대동시림』에 날인된 채무일의 책도장 3개


이 도장의 주인공인 채무일(蔡無逸, 1496~1556)은 인명사전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이다. 
지방에 해당하는 경상도 함창(상주) 출신으로 27세인 1522년에
생원(유교 경전 시험)과 진사(문학 시험) 시험에 모두 합격하였다. 
그것도 생원 시험에서는 장원(1등), 진사 시험에서는 9등을 했다. 
이후 문과 시험에도 급제한 능력자다. 

그뿐만 아니라 추천을 받아 중종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글씨와 그림에 능했다. 
또한 천문관측기기인 간의(簡儀)를 수리할 정도로 과학기술에도 밝았다. 
철학, 문학, 정치, 그림, 과학 등 다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인물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채수(蔡壽, 1449~1515)라는 유명한 사람이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한 중종반정(1506)의 공신이었지만,
이후 관직을 버리고 처가인 경상도 함창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설공찬전(薛公贊傳)』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설공찬전(薛公贊傳)』은 설공찬의 혼령을 빌어 저승의 이야기를 들어 현실을 비판한 내용인데,
왕이라도 반역으로 집권하면 지옥에 떨어지고, 간언하다 죽은 충신은 저승에서 높은 벼슬을 하며, 
여자도 글만 알면 관직을 맡을 수 있다는 등 당시 지배층의 생각과는 상반되는 면이 있었다.
소설이 세상에 알려지자 백성을 미혹시킨다고 하여 1511년에 중종의 명령으로 금지 서적이 되어 불태워졌다.
현재 이 소설은 한문으로 된 것은 없고, 한글로 번역된 것의 일부가 전하는데, 
『금오신화』에 이은 두 번째 고전소설이면서, 최초의 국문 번역 소설로 국문학사의 큰 지점을 점하고 있다.

한편,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지은 이야기책인 『어우야담』에는
할아버지 채수가 손자 무일을 키우면서 주고 받은 다음과 같은 한시 창작 일화가 실려 있다. 

“할아버지 채수가 밤에 무일을 안고 놀다가
孫子夜夜讀書不(손자야야독서불) ‘손자는 밤마다 도무지 책을 읽질 않는구나’라고 하자, 
손자 무일이 대답하기를,
祖父朝朝藥酒猛(조부조조약주맹)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약주가 과하십니다.’라 했고,

할아버지 채수가 눈오는 날 무일을 업고 마당을 걷다가 
犬走梅花落(견주매화락) ‘개가 뛰어가니 매화꽃이 떨어지는구나’라고 하자,
손자 무일이 대답하기를,
鷄行竹葉成(계행죽엽성) ‘닭이 지나가니 대나무 잎사귀가 만들어집니다.’라 했다.”

『신편유취대동시림』이라는 책 자체가 양반 문인 뿐만 아니라 승려, 여성, 귀화인 등 다양한 작가의 시도 수록되어 있어 『동문선』보다 풍부한 한시 사료를 제공하여 한국 한시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거기에 더하여 책을 채무일이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서인이 있어 더욱 가치를 높여 준다.

<편집위원: 최경훈, 학술정보서비스팀 고문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