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6/98호(8월)

[고문헌산책 6] 영산김씨세계

[고문헌 산책] 영산김씨세계(永山金氏世系)


거짓으로 속여 후손으로 이름을 올린 사실이 적발된 족보, 후속 처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1684년(숙종 10) 무렵에 간행된 족보인 <영산김씨세계>로 살펴 본다.


족보란?

‘족보가 뭐예요?’라는 물음에, ‘우리집 내력’, 즉 ‘한 집안의 역사’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고 한다. 자신이 누구의 후손인지 족보를 보면 그 뿌리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씨의 시작인 시조부터 남자 계통으로 수만명의 조상이 수록되는 이러한 족보는 우리나라의 특징 중의 하나이지만, 요즘에는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존비귀천(尊卑貴賤)이 엄격하게 적용되던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한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신분의 증빙 자료로써 중시되었다. 흔히 말하는 학연, 혈연, 지연 중의 혈연(血緣) 명단이 족보인 셈이었다. 그런 만큼, 명망있고 힘있는 집안의 족보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는 것은 해당 집안의 구성원으로서 그 지위와 신분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족보는 사람이 태어나면 신의 손에 의해 자동으로 생성되어 우리 앞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사람이 만드는 만큼 실수로 후손이 누락되거나 잘못 들어가기도 하고, 계통이 잘못 기입되는 등의 오류도 나오게 된다. 그러한 오류는 단순한 실수일 수도 있겠지만, 의도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오류가 발견되어 수정도 이루어지지만, 오류가 그대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영산김씨족보(1684)

동산도서관에는 조선시대에 간행된 많은 족보가 소장되어 있다. 이 가운데 족보 간행 마무리 단계에서 심각한 오류가 발견되어 그에 대한 조치 사항을 남긴 특이한 족보가 있다. 바로 1684년에 간행된 <영산김씨세계>라는 족보이다.

이 족보에서는 특이한 점이 있다. 바로 아래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이름에 먹으로 동그라미를 찍어 놓은 것이 상당 수 있고, 그런 동그라미가 있는 쪽의 윗쪽에는 동일한 내용의 기록이 찍혀 있다. 왜 누구의 후손 이름에는 하나같이 먹으로 찍어 표시를 했을까?

위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름이 먹으로 찍혀진 이유는 사진의 오른쪽 상단에 작을 글씨로 찍혀 있는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 기록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족보에 수록된) 윤옥(閏玉), 간옥(間玉), 말손(末損), 연옥(鍊玉) 등 4명은 누구의 후손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김엄의 후손이라 속이고 족보에 수록되어 족보를 더럽혔으니 통탄할 일이다. 당장 지워 없애고 바로 고쳐 잡아야 하겠지만, 물력이 이미 소진되어 다시 간행할 수 없다. 이에 집안 사람들이 합의하여 이름에 먹을 발라 표시하고 다음에 간행할 때는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위의 기록대로라면, 족보를 간행하고 난 뒤에 재차 확인을 하는 과정에서 후손이 없다고 되어 있는 사람의 아들로 4명이 몰래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책을 다시 간행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다시 간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에 잘못 기입된 사람은 모두 일일이 이름에 먹으로 표기하여 잘못 기입되었음을 나타내고, 다음 간행할 때에는 바로잡도록 한 것이다. 

실제로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1760년에 간행된 <영산김씨족보>에는 위의 합의 내용이 반영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조치 결과, 몰래 후손으로 들어갔던 그 4인의 후손은 선조를 잃어버리게 되어 족보를 상실하였고, 영산김씨 입장에서는 후손 아닌 사람이 족보에 기입되어 후손 행세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요즘의 관점에서 보면 그냥 웃고 넘길 일이겠지만, 당시의 당사자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 부여를 하였을 큰 사건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이라면 족보를 가지고 있고, 그 족보에 이름이 제대로 올라야 양반 행세를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사건으로 보는 것이 한편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편집위원 최경훈, 학술정보서비스팀 고문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