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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호(10월)

[고문헌산책 17] 청송심씨족보

[고문헌산책]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

 

1713년 영주 부석사에서 간행된 청송 심씨의 족보.
그 속에 표기된 세종비 소헌왕후 등 왕후 표기를 살펴봅니다.

 

1713년 순흥부(영주)에서 간행된 청송 심씨의 목판본 족보이다.
이 족보는 청송 심씨의 후손 심득량(沈得良)이 순흥부사로 부임하여 목판에 새겨 간행한 후에 목판은 인근의 사찰인 부석사(浮石寺)에 보관하였다.
조선시대 목판본 족보의 간행은 대부분 후손이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목판의 관리는 사찰의 승려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목판에 새겨 책을 간행하는 것은 책을 찍고 해체하여 다시 찍을 수 없는 활자 인쇄와 달리 한번 새기면 계속해서 찍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청송 심씨 족보를 넘기다 보면, 왕후가 표기되어 있다.
대표적인 왕후는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 심씨이며, 심온(1375-1418)의 따님이다. 심온은 1418년에 세상을 떠나는데, 그 해는 세종이 즉위한 해이며, 600년 전의 일이다. 세종이 즉위한 해에 장인이 죽었다. 그 이유는 상왕인 태종을 비판한 일로 '강상인의 옥사'로 불리는 역모 사건에 심온이 배후로 지목되어 사약을 먹고 죽은 것이다. 왕후의 아버지, 즉 부원군이 되지 못하고 사약을 먹게 된다.

 

1418년, 태종은 전격적으로 세자(양녕대군)를 폐하고,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세웠다. 몇 달 뒤,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이 되었다. 그리고 외척의 득세를 우려해서인지 세종의 처가를 그렇게 해버렸다.

 

<청송심씨족보>의 심온, 소헌왕후 부분을 펼쳤다.

그림설명.

1. 소헌왕후, 문종대왕, 세조대왕 등 왕과 왕후는 위에 원래 들어가야 할 곳에는
   글자 수만큼 OOOO로 공란을 두고 해당 면 상단에 표기한다.
2. 안평대군 이용, 금성대군 이유는 친형인 세조 재임 시에 역모로 사약을 받았기
   때문에 이름 옆에 '사사(賜死)'라고 표기되어 있다.

 

역사적인 사실인 사약을 먹고 죽었다는 기록은 없다. 평범하게 기록되어 있다. 소헌왕후의 아들이면서 세조에 반기를 들어 목숨을 잃은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부분에는 '사사(賜死)'라고 표현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청송심씨의 족보,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 그런지 선조의 기록을 애써 표기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청송심씨족보> 몇 장을 넘기다 보니, 왕후가 여럿 나온다.
인선왕후(효종비), 인현왕후(숙종비), 인성왕후(인종비) 등.

 

위의 그림을 보면, '인현왕후는 여흥 민씨인데, 류자해의 아들인 류양 부분에 있다. 왜 그렇지?'라는 생각이 든다. 아랫 부분 박스 안의 작은 글자가 그 이유를 말해 주고 있다. 

 
심온의 사위인 류자해의 둘째 아들이 류양이다. 이름 옆에 '목사(牧使)'라는 관직명이 표기되고 O 다음에 7행에 걸쳐 있는 내용이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사위의 아들의 사위의 아들의 딸이 인현왕후라는 것이다. 심온으로부터 출발해서 10대를 내려가야 인현왕후를 만나게 된다. 그것도 아들의 자손인 본손과 딸의 자손인 외손을 넘나들면서.

 

왜 이렇게 10대를 내려가야 만나는 왕비를 표기했을까? 왕비를 낸 가문임을 표기하기 위해서다. 그 바탕에는 두 가지 상반된 정서가 흐른다. 조선 후기 족보에서는 남성(아들)의 계보를 따르는 본손을 중심으로 기재하고, 여자(딸)의 계보인 외손의 경우 사위, 외손자 정도로 그친다. 본손과 외손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자손으로 기록하는 방식은 남녀 평등의식이 있던 17세기 이전 족보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10대를 내려가야 만나는 인현왕후를 조선후기 족보에서는 표기하기가 어렵다. 10대를 본손과 외손을 모두 기록해야 <청송심씨족보>에서 인현왕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왕후를 배출한 집안과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연결되는 지점에서 장황하게 표기하여 가문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번 고문헌 산책에서는 <청송심씨족보>를 통하여 족보에 모든 사람을 기록할 수 없지만, 꼭 필요한 사람은 기록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드러나는 왕후 표기 부분을 소개하였다.

<편집위원: 최경훈, 학술정보서비스팀 고문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