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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7호(3월)

[고문헌산책13] 훈련도감자

[고문헌 산책]  훈련도감에서 만든 나무활자들


1592년 임진전쟁 이후의 폐허 속에서

인쇄 출판의 역할을 담당했던 중앙군사조직인 훈련도감. 

그 훈련도감에서 만든 나무 활자로 찍은 책에 대해 살펴본다.


조선의 시기를 가르는 중요한 사건인 임진전쟁.

(흔히 우리의 관점에서 임진왜란이란 말을 사용하지만, 임진년에 있었던 왜군의 난리라고 별 일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사건이다. 이 전쟁 이후 명이 망하고 청이 흥기하는 국제 전쟁이란 인식이 강하다. 요즘에는 한중일 삼국에게 객관적인 명칭인 임진전쟁을 사용한다.)


임진전쟁은 조선의 많은 것을 파괴하고 앗아갔다. 개국 후 지속되던 평화 속에서 구축된 질서의 모순이 드러났고, 그로 인해 전쟁 속에서 위정자의 가면은 벗겨져 치부를 드러냈으며, 전쟁 이후의 폐허 위에 새로운 변화들이 생겨났다.


전쟁 이후 책을 만드는 인쇄 출판 분야를 들여다보자.


많은 책들이 불타 사라지거나 일본군과 동행한 일본 승려와 이들에게 책의 소재처를 알려준 친일 조선인들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인쇄 출판 도구였던 중앙관서의 활자도 불타 없어졌다.

활자로 서적을 인쇄하던 기술자들도 죽거나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래서인지 전쟁 이후에 일본에서는 활자 인쇄가 꽃을 피웠다.

반면 조선에서는 활자가 없어져 인쇄가 어려웠다. 국가 재건을 위해서는 서적이 필요했다.


그 역할을 전쟁 중에 설치된 훈련도감에서 담당했다.

훈련도감은 부족한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기존에 전해오던 활자로 인쇄된 서적을 이용하여 여러 종류의 나무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하였다. 이 나무활자는 훈련도감에서 만든 활자라 하여 '훈련도감자'라 부르고 있다.


17세기 전반기에는 무수히 많은 책들이 훈련도감자로 찍혔다. 우리가 잘 아는 허준의 <동의보감>도 1613년에 이 활자로 찍혔다.


훈련도감자로 찍은 책 가운데 1610년 8월에 출판된 <주문공교창려선생집>을 소개한다. 이 책은 주문공(송나라 유학자 주희)가 교정한 창려선생(당나라 학자 한유)의 문집이다. 한유는 유학자이면서 당송 시대를 대표하는 문장가 8인을 지칭하는 당송팔대가 중 한 명이다. 



훈련도감자가 가지는 의미는 전쟁 직후 훈련도감 운영비 충당을 위해서 관청에서 서적을 판매했다는 점이다. 임진전쟁 이전에 서적의 유통은 대체로 임금의 하사품이나 제한된 비매품 배포에 의존했다. 글을 읽는 식자층인 양반의 수도 적었다. 필요한 만큼 찍어서 아는 사람들끼리 나누어 가지면 그만이었다. 성현의 말씀이 적힌 고귀한 책을 공개적으로 사고 판다는 것에 사회 통념상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돈을 벌기 위해 관청에서 책을 찍어 판매했다는 것은 상당히 주목해야 할 변화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끝에는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이 책의 간행에 대하여 설명한 글이 있다. 그 글 속에는 안평대군의 글씨로 찍은 책을 가지고 활자를 만든 내력이 적혀 있다.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훈련도감에서 군량을 충족시키는 방도로 서책을 인쇄하여 이를 팔아서 군량을 저축하여 왔다. 그러다가 안평대군이 쓴 인쇄본을 얻어 활자로 만들어 이 책을 맨 먼저 인쇄하니 사대부들이 다투어 사려고 달려왔다. 이것을 팔아서 공인들의 월급을 이자로만 충당이 되고 오히려 남음이 있었다."


이항복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훈련도감에서는 활자로 책을 찍어 판매함으로써 운영비를 충분히 감당하였고, 폐허 속에서도 책이 유통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문 기술자가 아니라 활자 제작 솜씨가 서툰 면이 있다. 그러나 서적 인쇄를 그나마 훈련도감에서 수행한 결과, 도서의 출판과 유통이 이어질 수 있었고, 조선의 출판 인쇄 문화는 다시 제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전쟁의 폐허 뒤에 국가 군사조직인 훈련도감의 운영비도 제공하지 못했던 당시의 현실. 민병대도 아니고 정규군 조직이 자급 자족의 길을 모색하고 실행해야 했던 현실 속에서 탄생한 무수히 많은 책 가운데 안평대군의 글씨로 활자를 만들어 처음 찍었던 책을 소개하였다.


<편집위원 최경훈, 학술정보서비스팀 고문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