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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호(1월)

[고문헌산책 11] 분류보주이태백시

[고문헌 산책] 분류보주이태백시

 

광해군이 세자의 스승에게 내린 이태백의 시집

  지금은 누구나 인터넷서점을 통해 1-2만원의 비용으로 자신이 원하는 책을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책을 사고파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회였다. 18세기에 와서야 겨우 서점이나 도서대여점이 사람들 사이에 모습을 보인다. 책에 대한 수요가 손익분기점을 넘어서서 책장사로도 먹고 살 만큼 사회가 양적으로 성장하였음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출판과 도서유통 시스템은 대중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책을 구해 보았을까?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출판 유통 시스템은 판매 방식이 아닌 비매품 한정판 증정 형식이 대세를 이룬다. 그 가운데 가장 고급스럽고 권위 있는 것은 궁궐에서 책을 만들어 임금의 명으로 신하들에게 하사되는 책이다. 사용된 재료는 받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고급의 종이나 먹이 사용된다. 책의 내용도 국왕의 통치에 필요한 책이 주종을 이룬다.

  동산도서관에도 조선시대 국왕이 신하에게 하사하였던 책들이 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이번에 소개하는 책은 광해군이 세자의 스승이었던 배대유(裵大維, 1563-1632)에게 내린 <분류보주이태백시>라는 책이다.

  이태백은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을 말한다. 이 책은 명나라 사람 소사빈이 이백의 시(詩)를 주제별로 분류하고 설명을 붙여 편찬한 것이다. 조선초기부터 중앙관청에서 인쇄하여 보급하고, 지방에서는 다시 곳곳에서 여러 차례 간행된 만큼 식자층에게 인기 있는 책이었다. 
 

왕이 내린다는 내용의 문서를 처리한 승지의 결재문서와 옥새

  이 책을 넘겨보면 오른쪽 면에는 책을 누구에게 준다는 기록이 있다.(아래 사진) 바로 “명나라 만력 황제가 즉위하고 46년째 되던 해(1618)의 11월에 세자에게 경서를 가르치는 벼슬인 시강원보덕 배대유에게 이태백집 1건을 내린다.”는 기록이다. 기록 말미에는 임금의 명을 받아 업무를 처리한 승정원의 좌승지 유(劉) 모(某)의 결재 싸인이 있다. 왼쪽 면의 상단에는 큰 도장이 찍혀 있다. 이 도장은 임금이 선물을 내릴 때 사용하는 옥새의 일종이다.

사진설명: 오른쪽(표지 안쪽)에 있는 승지가 결재하는 문서, 왼쪽 본문 시작에 찍힌 임금의 도장. 이는 전형적인 임금이 내리는 책의 발급 형식이다.

 

  책을 받았던 배대유는 경남 영산(靈山)이 고향이며, 1590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 임진전쟁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을 수비하였으며, 1608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당색은 대북에 속하여 선조의 적장자였던 영창대군의 일파를 몰아내는 계축옥사(1613) 때 반대파를 추국하는 데 공을 세웠고,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 책의 하사가 이루어진 1618년에 광해군은 조선의 국왕이었고, 책을 받았던 배대유는 세자 교육 기관인 시강원에서 세자를 가르치는 관직에 있었다. 이 해에 선조의 계비였던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623년에 동생을 죽이고 모후를 폐위시키는 등 천륜을 거슬렀다는 죄목으로 서인이 군사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가 즉위하였다. 그와 동시에 권력을 잡고 있던 대북에 속했던 사람들은 목숨을 잃거나 관직을 잃었다. 세상이 한 순간에 뒤바뀐 것이다. 배대유도 그때 관직을 잃었다. 책을 하사받고 4년이 지난 후였고, 관직이 삭탈되어 그 뒤로는 임금에게 책을 받는 일은 없었다.

  군사정변이 성공하고 인조가 즉위한 후,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배대유가 가르쳤던 세자도 세자빈과 함께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위리안치란 유배지의 사방을 높은 담으로 둘러 출입을 통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일국의 세자였던 사람이 땅굴을 파고 탈출을 감행한 후에 붙잡히는 불미스런 일이 벌어진다. 사건 직후 세자빈은 자살하고, 세자는 인조의 자진 명령을 받은 후 목숨을 끊는다. 자신이 믿고 따랐던 주군의 아들이면서, 한때는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의 죽음을 접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정치 이상을 실현한다고 믿으면서 권력의 한 복판에 있을 당시에 국왕으로부터 받았던 이 책을 보면서 그 시절을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책이 귀하고 값비쌌던 시절, 임금이 내린 책은 오늘날 ‘명품’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해당 책은 대부분 중앙 관청에서 제작되는 고품질의 서적이었고, 임금이 내리는 하사품이었으므로 품질과 권위를 모두 가지는 시대적 상징물이었다. 그 책에는 받는 사람이 있고, 업무를 처리한 승지의 싸인 정보가 있다. 이들은 당대 임금을 중심으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이라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 

 

<편집위원 최경훈, 학술정보서비스팀 고문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