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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호(1월)

[독계비]'사십사'를 읽고

讀.啓.肥(독.계.비)]는 ‘독서로 계명을 살찌우자’라는 목표로 릴레이 독서 추천 형식으로 꾸며가는 코너입니다.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소감과 함께 원하는 사람에게 추천해 주고, 그 사람은 추천받은 책을 읽고 난 후 또 다른 책을 본인이 원하는 사람에게 추천해 주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이번 호에는 최창환(신소재공학과3)군에게 「칼의 노래」를 추천받은  임영빈(문예창작학과3)군이 「사십사」를 홍용섭(행정학과2)군에게 추천합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눈동자에는 선명한 나이테가 있다. 그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세월의 낙인이자 삶의 원천적 굴레다.

74년생 백가흠은 이번 소설집 <사십사>를 통해 그 짙은 나이테의 음영이, 둘레가 어떻게 형성 되었는가? 를 지독하게 조망해냈다. 그의 잔혹하고 처참한, 파괴적 세계관은 이미 <귀뚜라미가 온다><조대리의 트렁크>를 통해 엿본 바가 있었지만 이건 예상 밖이다. 물리적 사건 없이 오로지 40대 주인공들의 궤적, 그들이 남겨 놓은 선명한 나이테의 근원을 좇는 시선만으로 더욱 위태로운 서사를 구축해냈다.

20년 만에 재회한, 잔혹했던 동창의 풍요로움에 짐짓 허세를 부리는 '' (한 박자 쉬고), 학교 조교를 성추행하고 고립된 이기적인 중년의 대학 교수 ''(더 송The Song),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동거녀를 떨쳐내지 못하자 기르던 개를 죽이고 모르는 척 하는 '' (흰 개와 함께하는 아침), 구조조정으로 실직자가 되어 이웃이었던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부수는 용역이 된 '' (사라진 이웃), 광주에서 동생을 방치했다 죽게 만든 트라우마로 교조적 크리스천이 된 우격다짐의 '' 까지. 총 아홉 편의 단편 속 그 어떤 주인공도 비루하지 않은 인물이 없다. 모두의 중년은 처참하고, 비루하고, 권태롭고, 신경질적이다. 그리고 그게 현실,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근현대사를 관통한 70년대생 들이다. 가난을 맨 몸으로 받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가장으로서 죽을 듯 돈을 벌어 가정을 부양해낸 히어로들. 그러나 온갖 잡스러운 것들에 열광하는 2000년대에 그들의 서사는 꼰대스러운 과거의 유물이 되어 버렸고, 그들의 가치관은 통째로 현대 사회의 '가해자'로 돌변해버렸다. 


때로 그들은 존재 자체가 죄가 된다. "학교도 대충 다니고 적당히 일하면 학비 벌리

, 대학 나오면 골라서 취업하던 당신들이 우리에 대해 무슨 말 할 자격이 있어?" 이제 사회의 주류가 될 별무리들은 늙어빠져 가장 빛나는 별의 존재가치를 은폐시킨다. 당신들의 빛은 이기적이야 라고.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 세대가 모두 잘 사느냐? 아니다. IMF가 있었고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있었고 그 이전에 구조적 한계가 있었고 그, 그 이전에 여전히 가난하고 굶주리던 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나이테에는 무엇이 새겨졌는가. 때 없이 분노하고 한없이 이기적이고, 때로는 몰상식해 보이는 그들. 나의 어머니 아버지, 당신의 부모님, 우리의 뿌리들. 40대는 여전히 배고프고 가난하다. 그건 40대의 숙명인걸까, 시대의 형벌인걸까. 백가흠의 뼈아픈 성찰은 그 자체로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