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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호(11월)

[고문헌 산책 9] 어정사기영선

[고문헌 산책]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

1837년 2월 28일,
성균관에서 실시된 시험의 합격자에게 왕이 책을 내리다.

  사람 사는 곳이면 시험이 있게 마련이다. 시험은 경쟁을 통하여 우열을 가리기 위한 것이고, 우수한 사람에게는 상장과 함께 부상(副賞)이 주어진다. 지난 주에 있었던 <2016 동산도서관 가을 페스티벌>에서도 우수한 사람에게 상장과 상품이 주어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고문헌 가운데 ‘상품으로 내려진 고문헌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지금 고문헌 전시회에 전시 중인 고문헌 한권이 떠올랐다.

 

고문헌 전시회, '왕이 내린 책'에 전시 중

  이번 고문헌 전시회는 <왕이 내린 책>이란 주제로 열리고 있다. 그 가운데 왕이 시험 성적 우수자에게 내린 책도 전시되어 있다. 바로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이란 책이다. 책 제목은 ‘임금이 정한 책인데(어정), 사마천의 <사기>에서 빼어난 것을 선별하였다.(사기영선)‘라는 의미다.

  책을 정한 임금은 정조대왕이다. 정조는 1796년에 중국 역사 속에서 충신 등과 같이 귀감이 되거나 간신과 같이 경계할 인물을 엄선하여 책을 완성하고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신하에게 내렸다. 그러면서 대구, 전주, 평양의 감영(도청)에서는 활자본을 그대로 목판에 새겨 사람들에게 배포하도록 하였다. 자신이 직접 책을 쓰고 이를 출판하여 내리고, 다시 대량 생산이 용이한 목판에 새겨 배포하도록 한 것은 역사 속 인물을 제시하면서 보고 배우기를 바라는 국왕 정조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많이 찍혀져서 지금도 다량이 전하고 있다. 그 만큼 많이 읽혔던 책이다.

  동산도서관에도 책 구하기가 어려워 보고 베낀 필사본을 포함하여 여러 종이 전하고, 그 가운데 시험 성적 우수자에게 내려진 <어정사기영선>이 있다. 책을 넘기면 그러한 내용을 담은 기록이 나온다. 바로 “중국 도광 황제 즉위 17년(1837년) 2월에 삼일제 시험에서 차상(次上)에 든 유생 박흥수(朴興壽)에게 <사기영선> 1건을 내린다”라는 기록이다.(아래 오른쪽 사진) 



  한 장을 더 넘기면 큰 글씨로 된 제목이 있고, 그 왼쪽에 “병진년(1796) 내각(규장각)에서 활자로 찍었다(丙辰內閣活印)”는 기록이 있으며, 왼쪽 면에는 ‘규장지보(奎章之寶)’라는 큰 도장이 찍혀 있다. 이 도장은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한 이후에 임금이 내리는 책에 찍었던 도장이다.(위 왼쪽 사진)

 

시험에 합격한 박흥수, 왕으로부터 책을 선물 받다.

  위 사실을 시간순서대로 정리하면, 1796년에 정조가 책을 편찬하여 신하들에게 나누어주고 남은 것이 다수 규장각에 보관되고 있었고, 30여 년이 지난 1837년(헌종 3)에 성균관에서 실시된 시험의 합격자에게 1부가 내려졌으며, 그 책이 동산도서관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위 내용은 책 자체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정보이다. 기록을 확인하려고 <헌종실록>을 찾아 보았다. 아쉽게도 “성균관에서 과거를 실시하였다.”는 짧은 기록만 있다. 더 상세한 정보를 알고자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의 일지인 <승정원일기>에서 해당 내용을 찾아 보았다. 내용이 아래와 같이 <헌종실록>보다 상당히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제학 조인영이 ‘이번 시험의 합격자는 20명인데, 등급을 어떻게 나눌까요?’라고 하니 임금이 ‘1등급은 2명, 2등급은 3명, 3등급은 15명으로 하라’고 하였다. 조인영이 등급 매기기를 마치자 임금이 ‘1등인 유생 황종근은 바로 문과 본 시험인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고, 2등인 진사 박경선은 가산점 2점, 2등급인 유생 정희 등 3명은 가산점 1점을 부여하라. 나머지 3등급인 권용수 등 5명에게는 각각 <사기영선> 1권을 주고, 김정현 등 5명에게는 각각 <주서백선> 1권을 주고, 서미순 등 5명에게는 각각 <팔자백선> 1권을 하사하라. 입격자 시상은 내일 연영문(延英門) 밖에서 거행할 것이다.’라고 하명하였다.

  위 <승정원일기> 기록에 박흥수라는 이름이 나오지는 않는다. 연결고리는 "권용수 등 5명에게는 <사기영선>을 하사하라."는 것이다. 박흥수의 이름이 아니라 다른 사람 1명을 대표자로 거론되어 박흥수는 '등'에 포함되는 셈이라 <승정원일기>의 기록과 책의 기록이 일치한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이 시험에서 5명에게 <사기영선>이 상품으로 내려졌으며, 이외에 <주서백선>과 <팔자백선>이라는 책도 각각 5명에게 내려졌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 책 3종은 모두 정조가 편찬한 책이다.

  해당 시험에서 합격한 20명 가운데 1등에게는 과거의 본시험(회시)에 예비고사(초시) 없이 응시할 자격을 주었으며, 2등부터 5등까지는 가산점을 주었다. 그리고 6등부터 20등까지 15명에게는 책을 하사한 것이다.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특별 시험에서는 대체로 그렇게 혜택과 시상이 이루어졌다.

 

내 삶의 王인 내가 고른 한 권의 책을 읽어 보는 것은 어떨까?

  1837년 2월, 매년 실시되는 이 시험에서 1등에게는 예비고사(초시)를 면제해 주었다. 1등이 아니더라도 합격을 하면 가산점을 부여받거나 왕으로부터 책을 하사받는다. 그 자체가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표창을 받는 만큼 상당한 의미 부여가 되는 것이다. 집으로 가서 부모님께 보이고, 친구들에게도 보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열심히 책을 읽지 않았을까?

  요즘은 책을 선물로 주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만큼 책을 볼 동기와 환경이 사라져가는 느낌이다. 오히려 한잔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스타벅스 쿠폰이나 한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롯데시네마 쿠폰이 한 권의 책보다 더 인기가 있는 듯 하다. ‘조선시대에는 책이 귀해서 책 한 권이 머슴 1년치 봉급과 같았다.’는 말도 있는데...

   2016년도 이제 두 달이 남지 않았다. 2016년이 가기 전, 잠시 시간 내어 내가 선정한 ‘올 해의 책’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책 읽는 데 보낸 시간에 비해 얻는 것이 적다거나 당장 눈에 보이는 이득이 없다는 생각에 과감히 ‘얼음~’이라고 마법을 걸어보자. 그리고 비록 ‘왕이 내린 책’은 아니지만 내 삶의 왕인 내가 나에게 살며시 내민 한 권의 책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제안해 본다.

 

<편집위원 최경훈, 학술정보서비스팀 고문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