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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3호(3월)

[고문헌 산책1] 신한첩(보물 1629호)

[고문헌 산책1] 신한첩(보물 1629호)

출가한 공주의 안부를 걱정하며왕실에서 보낸 한글 편지 35편을 후손이 모아 전하다.

20163월부터 도서관 1층 로비에 고문헌이 전시된다. 우리 도서관에 귀중한 문화재가 많음에도 우리 구성원이 잘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마련되었다. 이번 달에는 가장 대표적인 자료이며, 보물 1629호로 지정되어 있는 <신한첩>이 전시되고 있다 

<신한첩>은 한마디로 왕실  편지를 모은 첩이다. 구체적으로는 조선시대 효종현종숙종의 3대 왕과 인선왕후명성왕후인현왕후의 3대 왕비 등 6인이 쓴 한글 편지첩이다.

    

- 신한첩의 표지(좌)와 효종의 편지(우) -

수록된 편지는 효종 2, 현종 3, 숙종 6, 인선왕후 18, 명성왕후 1, 인현왕후 5편 등 모두 35편이며, 편지를 받은 사람은 효종의 넷째 딸인 숙휘공주(淑徽公主)와 부군 정제현 등이다.(효종의 딸 중에 장녀인 숙신공주는 일찍 죽어 경우에 따라 숙휘공주를 셋째공주로 말하기도 한다)

출생과 혼인, 그리고 불행

숙휘공주(1642-1696)는 아버지 효종과 인선왕후(덕수 장씨 장유의 딸) 사이에서 병자전쟁 후 볼모로 끌려가 있던 시기인 1642(인조 9)에 심양에서 출생하였다. 165312세의 나이로 경기도 고양에 거주하던 같은 나이였던 영일정씨 정제현(鄭齊賢)과 혼인하였다. 정제현은 포은 정몽주의 후손으로 할아버지가 당시 우참찬과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정유성(鄭維城)으로 명문가였다. 혼례를 하고 난 후 처음에는 시댁에서 사랑을 받으며 생활하였다. 슬하에 21(효희, 인상, 태상)를 두었으며, 외할머니를 만나러 궁궐 출입을 하며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결혼한 지 7년이 지난 1660(19) 무렵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17세기 중후반은 전세계적으로 기온이 떨어지는 소빙기였다. 평균 기온이 낮아 흉년이 들고, 식량이 부족하면서 전염병이 창궐하였고, 조선에서만 100만 가까운 사람이 목숨을 잃은 시기였다. 이러한 재난이 숙휘공주에게도 찾아와 시부모와 시삼촌이 연이어 죽고, 남편 또한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1662년에 21세로 죽었다. 이 일에 대하여 숙휘 공주의 모친인 인선왕후가 숙휘공주의 시할아버지인 정유성의 첩이 저주하여 일가에 불행이 있었다고 의심하여 의금부로 하여금 조사를 하게 하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과정에서 시댁의 여종 예금(15)이 고문을 받다가 죽기까지 하였다. 숙휘공주의 자녀 3명 중에서 둘은 어려서 일찍 죽은 듯 하고, 하나 남은 아들 태일(台一)마저 공주가 44세 되던 1685년에 25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집 온지 10년이 되지 않아 시댁의 많은 사람이 죽고, 남편과 자식 또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전통적인 유교 사회에서는 '복없는 여자'로 여겨졌을을 것이다. 또한 왕실이 개입하여 고문 끝에 여종 1명이 죽었기 때문에 집안의 노복들도 공주를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았던 효종의 딸이며, 현종의 동생이며, 숙종의 고모가 되는 숙휘공주가 받은 35통의 편지에는 그런 삶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불행이 시작되기 전의 편지에는 부모가 자식에게 던지는 농담 섞인 편지가 있고, 불행이 시작되면서 사위의 병환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편지가 있으며,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 혼자 남게 된 동생, 고모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가 있다. 

<신한첩>의 제작

조선시대 궁궐이란 비밀스럽고 신성스러운 공간이었기 때문에 왕실에서 받은 편지는 간직하지 않고 없애 버리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데 이 언찰은 지금까지 남아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왕실의 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은 아마도 연이은 마음 고생으로 병이 들었을 때 어머니와 오빠, 조카가 보내준 이 편지들을 읽으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기 때문에 그대로 집안에 전해졌을 것이다 

이 편지들은 1696년에 숙휘공주가 죽고 나서 100여 년이 지난 1802년에 선산 부사였던 5대손 정진석이 첩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책의 앞부분에 정진석이 쓴 한글 기록을 통하여 확인된다. 여기에는 이 첩을 만든 내력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두 첩이 건인즉 사조 어필이시요, 곤인즉 육성언찰이시라"라고 적고 있다. 즉 이 말은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던 어필들을 정리하면서 효종, 현종, 숙종, 영조의 사조의 어필(한자)을 따로 하나로 묶어 건()이라 하고, 효종, 현종, 숙종 내외 육성의 언찰(한글)을 따로 묶어 곤()하여 2권으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책의 끝에는 숙종비 인현왕후가 손수 만든 선낭(仙囊) 쌍몸이 붙어  있었으나, 인수할 당시부터 유실된 체 그 윤곽만 남아 있어 아쉽다. 

    

 - 숙종비 인현왕후(좌)와 숙종(우)의 편지 -

 

<신한첩>의 가치

보물 1629<신한첩>17세기 후반기 양반가에 출가한 공주가 왕실로부터 받은 한글 편지 35편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편지란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만이 공유하는 비밀스런 것으로, 이 편지는 특히 숨겨져 있는 출가한 공주와 왕실의 사연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또한 왕실 6인의 한글 서체를 전해주고, 수록된 용어는 당시 실제 한글 언어 생활의 알려준다. 특히 편지 이외에 편지의 내력과 제작 경위를 알려주는 후손의 한글 기록이 있어 단편적으로 흩어질 수도 있었던 개별 편지를 묶어 전승 관계를 알려준다. 이러한 점에서 <신한첩>은 조선 후기 왕실의 가족 생활과 한글 언어의 실상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생활 속 사례로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