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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칼럼] 흐르는 강물처럼

웹진 40호 [동산칼럼]에는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주제로 우리 대학 에너지환경과학과 교수이신 박상원 교수님의 칼럼을 싣습니다. [양봉석 ybs@gw.kmu.ac.kr]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 로버트 레드포드감독, 1982)은 1900년대 초반 미국 몬태나 주 강가를 배경으로 목사인 아버지와 두 아들의 삶에 관한 영화이다. 각기 캐릭터가 다른 세 부자가 낚시를 즐기며 어린 시절을 보내는 공통분모를 가진 채 각각 다른 인생의 강물은 흘러간다. 제아무리 가족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서로의 길을 나아가던 세 부자는 다시 만나게 되지만 같은 자리를 지나는 어떤 강물도 어제의 것이 아니듯이 그 자리에 모인 그들이 온전한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각자의 길로 흘러왔던 강물이 결국은 큰 강안에서 하나가 되고 또 더 힘차게 흐르게 된다는, 따라서 어디서 흘러왔는지 묻지 않고, 강물은 그저 모든 것을 품고 흐른다. 강물은 사랑의 이름으로 너그러이 품고 흐를 줄 안다. 강은 하나가 되기 위해 흐른다는 인생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단순하지만 묵직한 삶의 진실을 품고 흐르기에 더욱 아름답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이다. 

  
실제 강물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큰 강이 흐르기까지에는 수많은 작은 지천들이 합쳐져야 한다. 물론 각 지천들 마다 수질이나 수량 면에서 천차만별임은 당연하다. 이렇게 형성된 본류는 각 지천의 특징을 완화하기도 하며 그 스스로 자정작용을 한다. 그중에서 어떤 것들은 멀리까지 실어 나르는가 하면 어떤 것들은 그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강물의 또 다른 특징은 강물을 실어 나르는 주변 환경이 깎아지른 절벽이든, 굽이쳐 흐르게 하든, 아니면 완만히 흐르게 하든 그 어떤 환경에서도 그냥 주저 없이 흐르기만 한다. 특히 절벽과 같은 장애물을 만나면 뚫고 가기보다는 돌아서라도 자기가 가야할 곳에 기어이 도달하고 만다. 또한 강물은 상류에서 하류로 가는 과정에서 어떠한 것들도 다 품고 간다. 

  우리나라가 온통 정치권의 혼맥 상에 실망하고 있다. 오죽하면 안철수 신드롬이라 해서 정치를 해 본 적도 없고, 기업경영 이외의 행정경험이 없는 사람이 서울시장으로 회자되다가, 지금은 시민운동가를 후보로 내세우기 까지 이르렀다. 세계는 지금 온통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있다. 실용주의란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중도 실용노선이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필요에 따라 여야 전문가 인맥 풀에서 적절한 인사를 하여 이를 두고 좌우 이념의 길이 아닌 제3의 길이란 표현을 쓸 정도로 국가발전에 역점을 두고있다. 일본도 집권당이나 제1야당 모두가 중도실용주의를 중시하며 이념보다는 정책대결을 벌이는 추세에 있다한다. 그리고 국민 역시 실용적인 중도정치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좌파출신의 룰라 브라질 대통령도 재임 시 비틀거리는 경제 회생을 위해 분배보다는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 기조를 견지하여 사회의 안정은 물론 인기도 치솟았었다. 좌우의 논쟁은 국민을 편가르기 하며 소모적인 그야말로 구시대적인 그래서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아니되어야 할 것이다. 중도 실용주의란 듣기에 따라 매우 애매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진보 및 보수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적절한 균형 유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핵심은 상호간의 이질적인 것을 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강물은 낮은 곳이면 어디든 흘러간다. 때로는 줏대도 없어 보이고 소신도 없어 보인다. 좁은 곳이면 좁은 형태를 유지한 채 흐르고, 넓은 곳에선 천천히 그리고 얉고 너른 형태로 흘러간다. 이러한 다양한 사연을 담은 채 본류가 형성되면 그때는 그 어떤 힘도 거스릴 수 없는 도도한 강이 되어 흐르게 된다.

<사진출처: Weekly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