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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2호

[독.계.비]라일락 붉게 피던 집

[讀.啓.肥] [독.계.비] 코너는 ‘독서로 계명을 살찌우자’라는 목표로 독서릴레이 형식으로 꾸며가는 코너입니다.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소감과 함께 원하는 사람에게 추천해 주고, 그 사람은 추천받은 책을 읽고 난 후 또 다른 책을 본인이 원하는 사람에게 추천해 주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리며, 참여해 주신 분들께는 소정의 상품을 드립니다.

이 달에는 안수빈(심리학과, 3)양에게 「웃음과 망각의 책」를 추천받은 정소현(문헌정보학과, 1)양이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이승희(전자무역학과, 3)양에게 추천합니다.  

  과거가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과거’가 있다. 지금 길 한복판을 걷고 있는 당신에게 있어서 방금 지나쳐 온 옷가게의 간판 역시 당신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스스로 별다른 과거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평범하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했고 우리집은 어느 집과 다를 것 없이 마냥 평범하다. 친구들 역시도 유명인 하나 없이 평범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어쩌면 나에게도 내가 모르는 숨겨버린 과거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무서움이 생겼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인기 있는 대중문화평론가인 수빈도 처음에 신문에 연재할 때는 간단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평범했던 어린시절을 추억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수빈이 하나 놓친 것이 있다. 그녀는 그녀가 가진 기억과 추억이 모두 ‘사실’일 것이라고 섣불리 예단했다. 


  이야기는 수빈이 자신의 어린시절인 80년대 라일락하우스의 모습을 신문에 연재하면서 시작된다. 그 당시 10살도 채 되지 않았던 수빈은 자신과 친구인 우돌의 기억만으로는 글의 소재가 부족하다고 판단해서 당시에 라일락하우스에 같이 살던 이웃들을 광고하여 찾기 시작한다. 처음 광고가 나가고 한 사람, 두 사람씩 다시 이웃들을 만날 때는 서로가 추억을 나눌 수 있었다. 옆방의 꼬맹이들이 어느새 커서 아름다운 어른이 되어있었고 젊고 아름다웠던 청춘들은 중년이 되어 있었다. 

                                                                                                                                               
  그들이 함께하지 못했던 20년이 넘는 세월은 서로의 모습을 바꿔놓았고 서로가 가

진 기억도 바꾸어 놓았다. 이웃들을 만나면서 한 편씩 글을 쓰던 수빈은 어느 샌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왜 사람들은 그 좁은 곳에 같이 살았는데 옆집 새댁의 이름도 누군가가 죽던 날 밤의 이유도 모두 다르게 기억하는 것이었을까. 수빈은 점점 드러나는 의문과 함께 80년대 라일락하우스의 ‘그 날’에 다가서고 싶어 한다. 연보랏빛 향기 가득했던 라일락하우스는 하나, 둘씩 밝혀지는 ‘그 날’의 진실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아픔의 공간이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호기심이었고 평범한 추억이었던 공간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다시는 생각도 하기 싫은 공간이었다는 것을 수빈이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은 진실이 밝혀진 뒤였다.


  사람들은 모두 ‘판도라의 상자’ 하나쯤은 가슴 속에 품고 사는 것 같다. 본인조차도 쉽게 열어볼 수 없게 기억 속 저 깊은 곳에 묻어놓고 그런 상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런 판도라의 상자 말이다. 사람들에게 과거와 마주한다는 것은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 것 같다. 나와 좋은 관계였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다행이지만, 혹시나 나와 적대시한 사람들 다시 만나게 된다면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람과 함께 했던 그 ‘시간’도 함께 마주하게 되는 것이니 아주 커다란 심호흡이 필요할 것이다. 

  하나의 같은 공간에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개의 기억과 과거가 존재하고 100개보다 더 많은 관계들이 존재할 것이다. 나를 제외한 99개의 기억이 너무 궁금할 수도 있다. 99개의 시선이 기억하는 나는 어떤 모습일지 호기심이 생겨 잠을 못 잘 수도 있다. 하지만, 애써 꺼내지 않는 기억을 억지로 열어보는 것은 좋은 행동이 아닌 것 같다. 나에게는 평범했던 시간과 공간이 누구에게는 다시는 열어보고 싶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일 수도 있으니. 과거라면 과거에 묻어두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출처: 표지-Yes24, 사진-정소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