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4/77호

[독.계.비] 무진기행

[讀.啓.肥] [독.계.비] 코너는 ‘독서로 계명을 살찌우자’라는 목표로 독서릴레이 형식으로 꾸며가는 코너입니다.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소감과 함께 원하는 사람에게 추천해 주고, 그 사람은 추천받은 책을 읽고 난 후 또 다른 책을 본인이 원하는 사람에게 추천해 주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리며, 참여해 주신 분들께는 소정의 상품을 드립니다. 

이 달에는 이예지(한국어문학과, 2)양이 「무진기행」을 추천합니다. 

  금요일 저녁은 쓸쓸하다. 친구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떠나보내는 시간, 주말이 길어지게 만드는 시간이다. 다른 친구들은 주말이 짧다고 하지만 내게 주말은 너무나도 길다. 나는 애써 고향에 가는 것을 피하기 때문이다. 내 고향 강원도 춘천시. 그 곳은 내게 애증이 섞인 곳이다. 나는 일찍이 엄마와 헤어져 살았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다. 나는 마치 처음부터 엄마가 없었던 것처럼 자라왔다. 내게는 엄마 역할을 해주시는 분이 두 분이나 계셨다. 할아버지, 아버지. 이 두 분이 계셨기에 엄마의 빈자리는 전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초등학생이 되고 스스로는 느끼지 못했던 아니, 느끼지 않았던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게 되었다. 주변 친구들은 항상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등교하는 내가, 가을 운동회 날 할아버지가 싸주신 김밥을 먹는 내가 낯설었을까, 신기했을까 무엇 때문인지 친구들은 할아버지가 학교에 오시는 날이면 나를 울리곤 했다. 내게는 세상 누구보다 소중하신 분을 나의 어머니이신 할아버지를 함부로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야속했고, 친구들을 야속해하면서도 나는 엄마를 외치면서 울었던 것 같다.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거짓말을 하는 나쁜 버릇을 갖게 되었다. 초등학생 때도 안하던 거짓말을 중학생이 되어서 하기 시작했다. "이거 우리엄마가 사주신 거다, 이거 우리 엄마가 만들어 주신거야 ." 나는 할아버지께서 내주시는 사랑을 '부끄러움'으로 치부해버렸다. 언제나 거짓말은 들키기 때문에 그 말이 거짓말이 되어버린다는 아버지의 말 대로 나의 거짓말은 친구들에게 다 들통이 났고 아무도 내게 손가락질 하진 않았지만, 나 스스로 부끄러워 아버지를 조르고 졸라 원주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원주에서 적응을 하고 지내는 2년 사이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자신을 춘천에서 화장을 해달라고 하셨다. 당신의 고향은 춘천이 아닌 부산이지만 춘천은 나와 동생이 태어나서 중학생이 되기까지 할아버지와 함께 한 우리 가족의 시작이자 고향인 곳이니 그곳에서 아이들과 다시 함께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 하셨다면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뜻을 따라 할아버지의 유골을 춘천 추모원에 모셔 놓게 되었다.

  얼마 전 수업 발표 때문에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라는 책을 읽었다. 주인공 윤희중은 서울에서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고 고향인 무진을 모멸로 가득찬 곳으로 여긴다. 이유는 나와 다르지만 주인공 역시 나처럼 고향 가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안개가 명물인 무진. 마치 꿈속의 공간처럼 안개가 가득하다고 묘사 되어있는 무진을 상상하면서 나는 왠지 정말 이상하게도 배경묘사에서 눈물이 흘렀다. 늘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나 마주하던 춘천을, "내 고향은 원주야"라고 이야기하는 내가, 부끄러워 숨고 싶던 마음과, 내가 정말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뒤섞여 혼돈상태의 무언가가 나의 꿈에 나올 때 나는 그것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그래서 '안개로 뒤덮인 무진'이라는 표현이 내게 정말 더 와 닿았던 게 아니었을까.

  윤희중은 무진에서 하인숙이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인숙은 서울에 가기 위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마음을 머금고 윤희중에게 다가가갔지만 결국 윤희중에게 진실된 마음을 갖게 된다. 그 마음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 인숙은 윤희중에게 서울에 가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하인숙의 마음변화. 물질보다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이 여인의 모습 역시 무진기행에서 꼽히는 볼거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서울로 돌아오라는 '아내의 전보를 받은 윤희중은 전보와 오랫동안 다투게 된다.'라는 구절에서는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왜 무진기행을 읽어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윤희중이 말하는 무진은 모멸로 가득 찬 곳이었다. 또 안개로 뒤덮여 모호함의 상징인 곳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전보와 다툰다는 윤희중의 모습에서 그는 무진을, 어린 시절 악몽 같은 일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무진을, 사실은 그리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진을 긍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서울로 다시 돌아간다. 발표에서 나는 무진과 서울을 이상과 현실이라고 표현했다. 무진은 얼마나 이상적인 공간인가 어린 시절의 아픔이 살아있는 곳임에도 찾게 되는 곳, 모멸로 가득 차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자신이 이상이라고 믿던 서울로 가는 발걸음을 망설이게 만드는 곳. 한 친구가 주말을 고향에서 보내고 온 뒤 내게 말했다. "진짜 집이 최고다. 밥에 김치만 있어도, 엄마가 이틀 내내 잔소리만 하셔도, 동생이랑 쉬지도 않고 다투었지만 집이 최고다 최고야"

  고향이 아니어도 좋다. 사람들에게 하나쯤은 무진이 있었으면 한다. 자신이 바라는 삶이 성공을 해서 물질적인 것을 누리는 삶일지라도 무진은 있었으면 한다. 무진을 떠나기 위해 그리고 원하는 곳을 찾기 위해 열심히 살았으면 한다. 하지만 그러한 삶에 지쳐 우연히 무진에 들리게 된다면 그때는 푹 쉬었으면 한다. 안개에 뒤덮여 혼란스러운 그곳에서 아무생각 없이 쉬었으면 한다. 당신의 무진이 어디이든

기말고사가 끝나면 오랜만에 원주가 아닌 춘천을 가보려한다. 나의 진짜 고향을

나의 무진을...

 

<사진출처: 책표지-교보문고, 인물-이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