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동산칼럼] 시 읽기의 즐거움

웹진 39호 [동산칼럼]에는 '시 읽기의 즐거움'이란 주제로 시인이자 우리 대학 문예창작과 교수이신 장옥관 교수님의 칼럼을 싣습니다. [양봉석 ybs@gw.kmu.ac.kr]


  열목어라는 물고기가 있다. 유독 눈에 열이 많아 찬물 찾아다니며 눈을 식힌다 하여 그 이름을 얻었다. 광고․영화․게임․인터넷에 중독된 요즘 젊은이들의 벌겋게 달아오른 눈도 따지고 보면 열목어의 눈이 아닌가 싶다. 오전 첫 수업에 들어가 보면 초점 풀린 눈동자로 앉아 있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밤새 컴퓨터 앞에 앉아 새벽을 맞은 탓이리라. 원래 인간은 시각적 동물이다. 오감 중에서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7할이 넘는다고 한다. 각종 영상매체의 영향 때문인지 인간의 시각에 대한 의존도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느낌이다. 이러다간 인류가 파리처럼 눈알만 커다랗게 진화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다.


  문제는 시각이 인간을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에 있다. 눈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감각이다. 후각이나 미각, 촉각 등이 몸의 반응에 결부된 근접감각이라면 시각과 청각은 이성적 사고 작용의 지배를 받는 원격감각이다. 우리가 이 세계의 정보를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감각을 고루 사용해야 한다.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대중영상매체에 빠져 있는 동안 시청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은 무뎌지게 마련이다. 맨살을 어루만지는 바람의 촉감, 여린 풀벌레소리가 밤새 귓가를 간질여도 들을 줄 모르는 굳은 감각. 발뒤꿈치 같은 이 무딘 감각으로는 세계의 비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숫자와 속도와 말초적 쾌락에 빠진 삶에서 벗어나 생각하는 삶, 느끼는 삶을 되찾기 위해서는 감각의 회복이 우선이다.

  현대인에게 굳은 감각만큼 심각한 문제는 닫힌 감성이다. 인류가 망하게 되는 것은 핵무기 탓이 아니라 굳은 감각과 닫힌 감성 때문일 것이라는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다. 하학 길에 병아리를 사와 아파트 옥상에서 멀리 날리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 여기에 무슨 인류의 미래가 있겠는가. 나병은 그 병을 일으키는 특별한 병원체가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 아픔을 느끼는 통점이 없는 사람들이 나환자다. 나환자들은 정강이뼈가 보일 정도로 살이 썩어가도 태연하게 축구공을 찬다고 한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니 아무리 살이 썩어 들어가도 적기에 치료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암세포가 무서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몸이 썩어 들어가는 것은 그래도 눈으로 볼 수 있지만 마음이 썩어 들어가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 마음이 병들어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고칠 수가 없을 것이다. 시는 병든 마음을 고쳐주는 치료제다.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위로하는 따뜻한 마음에서 시는 탄생한다. 그것이 곧 연민의 마음이다. 주체와 타자의 경계가 무화되는 화해와 조화의 세계를 시는 추구한다. 시는 감정의 소산이다. 그러나 그 감정은 객관적으로 납득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시의 과학성이다. 따라서 시를 읽는 일에는 감성과 이성의 종합적 정신능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한낱 여기(餘技)에 불과한 시가 아니라, 정서순화교육 차원의 시가 아니라, 인간 심리의 이해와 삶과 세계의 진실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게 하는 시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진정한 의미다.

  그러나 아무리 뜻이 숭고하다 하더라도 즐거움이 없다면 누구도 선뜻 시집을 손에 쥐지 않을 것이다. 커피 한 잔을 즐기듯 시를 즐기는 방법을 중등교육 과정에서는 제대로 배우기 어렵다. 현행 입시체제의 국어교육 탓이다. 시는 살아 있는 유기체인데, 계량화․서열화가 목표인 교육에서는 시를 죽여 놓고 이게 간이고, 이게 염통이고, 이게 신장이라고 가르친다. 한마디로 시는 총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상상을 통한 시 감상법에서 비롯된다. 되도록 말을 줄이고 뜻을 넓히는 것이 시다. 짧은 형식에 많은 뜻을 담기 위해서는 상상을 통한 독자들의 의미생산 작업이 필수적이다. 시인의 입장과 처지에서 그 발언의 내용을 음미하는 일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정서적 공감이 이루어진다. 그 지름길이 몸을 통한 시의 감상과 이해다. 왜냐하면 시는 무용처럼 몸으로 느껴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시는 모든 사람의 몸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 못 믿겠거든 지금 당장 왼손바닥을 심장 아래 대고 오므려 살펴보시라.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는가. 어린아이 필체로 비뚤비뚤 적어놓은 단어, <시>!

[사진출처:웹진 시인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