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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독후감] 감시와 처벌: 감옥의 역사

[내가 쓰는 독후감] 2012학년도 봄페스티벌 책에 미친 비사夜2부: 밤샘 책 읽기의 수상작을 싣습니다.  [조용수 jys0110@gw.kmu.ac.kr ]

 

감시와 처벌: 감옥의 역사

언론영상학과 곽정애

  '책에 미친 비사야’를 신청하면서 신청 동기에 “책을 좋아하지만 밤을 새워 읽어본 기억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첫째로 밤새워 책을 읽는다는 그 자체에 호기심이, 둘째로 그렇게 읽은 책을 과연 어떻게 독후감으로 만들어 낼지 자신에게 궁금”하기 때문이라고 썼다. 자신에게 부여했던 두 가지 임무 중에 첫 번째는 반의 성공과 반의 실패를 이뤄낸 것 같다. 10시부터 5시 30분까지 8시간 남짓 한 번도 안 졸고 책을 읽는 첫 경험을 했기 때문이고 반의 실패라고 한 이유는 그럼에도 책을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부랴부랴 챙기고 입에 빵 한 조각을 집어넣으면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책을 고르려고 놓은 책들 앞에 섰을 때, 아뿔싸, ‘아르바이트가 있건 없건 그건 네 사정이지’라는 것 같이 무심하게도 그렇게 당연하게도 원래 책에서 참가인원 수만큼이 빠져있었다. 평소에 소설책보다는 철학이나 사회과학책을 주로 읽었기 때문에 오늘 만은 문학을 읽으리라 했건만 놓여 있는 선택지 중에서 나는 또 역시나 관성처럼 푸코의 책을 골랐다. 주어진 시간 동안 읽고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저번 학기 사회철학 수업을 들으면서 푸코를 공부하기도 했기 때문에 배경지식이 조금 있으니 쉽겠다고 생각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8시간은 짧게만 느껴졌고 책은 무심하게도 두껍기만 했다.

 미시권력과 계보학적 연구방법
   푸코는 ‘미시권력’을 말하는 철학자로 유명하다. 국가나 자본과 같이 거대한 권력이 개인 혹은 소집단에 미치는 거대한 권력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어떤 관계에서나 존재하는 정치에서 나타나는 미시권력 관계를 분석하는 것을 말한다. 이 책도 물론 그 미시권력 연구의 일종이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 「감시와 처벌」에는 부제가 딸려 있는데 바로 ‘감옥의 역사’이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푸코의 특성과 같이 이 책은 감옥에 관한 역사도, 감옥 그 자체에 관한 연구도 아니며 범죄와 처벌에 관한 범죄학적 연구와는 거리가 멀다. 푸코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은 “근대정신과 새로운 재판 권력의 역사”이다. 다시 말해서 재판 권력과 감옥 안에서 죄수를 다루는 기술을 학교·공장·군대 등 소단위의 권력체제를 통해서 어떻게 확산해 가는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밝혀내기 위해서 푸코는 ‘계보학적’이라는 틀을 통해 분석한다. 계보학적 연구방법은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기본 개념들에 대한 역사를 파헤친다는 점에서 역사학과 혼동되기 쉽지만 그 기본 개념들이 만고불변의 사실 혹은 경험이 아니라 우발적이고 가변적인 역사적 구성물들임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분명히 역사학적이라는 말과 구분되어야 한다.

   즉 광기나 범죄성 같은 개념들은 결국 근대적인 경험이고 권력과 주체화의 관점에서 논의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주어진 개념이 아니라 곧 우발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적 개념들을 푸코의 말에 의하면 “그간 역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또한 아무런 도덕적, 미학적, 정치적 또는 역사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간주하여 왔던” 자료들로 책을 꾸려가고 있다. 거대권력이 아니라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인 관행들에 나타난 인간 행위의 통제를 위한 미시권력, 처벌 방식을 바로 ‘감옥’이라는 수단으로 밝혀내어, 역설적으로 거시권력관계까지 확산된다고 볼 수 있다.

  신체형과 규율
   18세기 프랑스에서는 공개 고문이나 처형이 당연시되었다. 당시 군주적 권력은 범죄자들을 공개 처형시킴으로써 자신의 힘을 노출하고 피지배자들의 복종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처형장에서의 민중의 저항과 반론들은 이를 위기에 봉착하게 했다. 따라서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는데 이것이 바로 육체적 형벌(공개처형)이 아닌 형벌의 표상(감옥에 갇힌다는 그 사실)을 통한 이데올로기적 통제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감옥이 가지는 의미는 처벌 그 자체는 물론이지만 ‘범죄를 지으면 저렇게 되기 때문에 범죄를 지으면 안 돼’라는 예방적 차원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공개처형은 예방적 성격보다는 축제의 성격을 띠었다는 게 영어 ‘carnival'의 어원이 이 공개처형에서 왔다는 걸 통해 볼 수 있다.)

   현대사회로 넘어와 새로운 처벌 양식으로서의 ‘규율’이 등장한다. 푸코는 규율이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로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본다. 공장에서나 학교에서는 이 ‘규율’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이 되는 ‘효율성’(적은 비용으로 육체의 힘을 유용한 힘으로 극대화 시키는 것)을 확대시킬수 있었다. 앞 단락에서 언급되었듯 ‘감옥은 단순히 제도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의 처벌이나 범죄억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통제 및 통치의 차원’이라는 것에 맥락을 부여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장에서 푸코와 관련된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판옵티콘’이 나온다. 18세기 말 벤담이 고안한 ‘판옵티콘’은 원형감옥으로서 동그랗게 지은 감옥 가운데에는 건물 전체를 볼 수 있게끔 디자인되어 있다. 이는 정교하게 분할된 시간(규율)과 공간 틀 안에 개인들을 분배하고 감시, 관찰, 기록 및 평가 아래 놓이게 함으로써 그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건축학적 구현이다.

   푸코의 판옵티콘은 이런 육체적 예술일 뿐만 아니라 조지오웰의 「1984」속 ‘빅브라더’를 연상케 한다. 이러한 요소들로 둘러싸인 현대사회를 두고 ‘감시사회’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렇지만 감시 그 자체를 떠나 더 무서운 적은 바로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에서 오는 자발적인 행동양식의 검열이다. 예컨대, 편의점 아르바이트 시절, 사자님이 늘 내가 일하는 걸 지켜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24시간 돌아가고 있는 CCTV는 나를 보고 있을 거라는 압박을 느껴 스트레스였고, 혹시나 범죄 현장을 잡기 위한 도구가 결국에는 종업원의 행동을 조절하게 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손님이 없어서 편히 앉고 싶지만 그랬다가 사장님이 안 좋게 볼까 늘 긴장하는 모습 등) 이처럼 실제로 지켜보고 있느냐를 떠나 어떻게 감시사회가 작동하고 있는지 또 그간의 권력작용은 무엇인지 잘 설명해주는 부분으로 보인다.

  고전으로서의「감시와 처벌」
   음악과 마찬가지로 책도 그 책이 언제 쓰였든 상관없이 우리에게 ‘고전(classic)'으로 남아있는 것들이 많다. 아직 고전으로 불리기에는 1975년은 그다지 멀지 않은 시대이지만 그 사회가 지금 사회와 똑같을 수 없는 역사적 거리가 있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읽히면서 또 새롭게 이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한다는 것은 이 책이 우리 사회 속에 시사되는 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책이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것은 아직 학생들에게 철학책은 어렵기만 하고 그래서 읽고 싶지 않은 책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은 사고의 넓이와 깊이를 확장시키면서 내 사유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문득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것, 끊임없이 생각함으로써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철학이라는 학문 분과를 넘어서서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작업의 일종으로서 이 책은 ‘권력’과 ‘저항’이라는 역학관계를 나에게 과제로 던져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하필 지금 읽게 되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기도 한다. 지금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이 학원이다. 만약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냥 넘겨버렸겠지만 학교-학원-더 나아가 감옥 간의 관계가 ‘규율’이라는 것을 통해서 어떻게 권력화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였다. 낮 기온이 30도 가까이 올라가더라도 아직은 하복을 입을 ‘날짜’가 되지 않았으므로 하복을 입고 온 학생들을 처벌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규율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학교권력은 아직도 ‘공부’만이 살길이다라는 이데올로기와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1975년 프랑스에서 쓰인 이 책이 2012년 대한민국에서도 유효하다고 진단되는 이유이다. 

    그렇지만 과연, 모든 권력에는 저항해야 하는가, 아니면 효율성을 위해 복종해야 하는가, 더 나아가 불쾌한 복종을 희석할 수 있는 착한 권력은 있을 수 있는가? 물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지금 여기에 쓰자면 한도 끝도 없는 횡설수설일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사회권력 관계의 세부성과 그 기원으로서의 감옥, 또 그 속에서의 저항의 의미를 묻게 해주었고 이 모든 걸 깨닫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나에게 이 책은 하나의 고전으로 남게 될 것 같다.

 마치면서
   430쪽에 담긴 어려운 단어와 난해한 사상, 그 해석을 이해하면 읽기에는 8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마지막 4부에 대한 정리는 하지 못한 미흡한 감상평은 여기서 마친다. 마치면서 ‘책에 미친 비사야’에 대한 소회와 짧은 감사인사를 덧붙이고 싶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졸린 눈을 비빌 수 있도록 끝없이 제공되는 간식과 선생님들의 격려는 왜 이 행사가 계속될 수 있는지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같이 밤새웠던 학우 분들께는 수고했다는 말을 마지막에 찍은 기념사진과 함께 남기고 싶고, 책과 밤샘이라는 듣기만 해도 힘든 조합에 긴장을 풀어주시려고 다가와주시는 선생님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드린다. 4학년이라 다음번 ‘책에 미친 비사야’에는 함께 할 수 없겠지만 학교생활 끝자락에서 행사가 끝나고 마주한 새벽 푸름과 같은 추억을 만들 수 있어 행복했다. 

 

싯다르타를 읽고

경영학과 강준욱

 

   우리는 보통 자기 자신이 좋은 책을 찾아서 읽고 좋은 지식을 얻는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사람과 책의 관계는 분명히 사람이 주도하는 관계인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좋은 책이 사람을 찾아오는 일도 있다고 한다. 가령 이런 식의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 행사에 참석해서 별 생각 없이 집어든 책이 자신이 고민하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또 그와 관련해서 인생을 성찰할 기회를 얻게 된다면? 그렇다면 정말로 책이 자신을 찾아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 ‘싯다르타’가 그런 책이었다. 저녁까지 이어지는 수업으로 피곤한 와중에 참가한 행사 때문에 읽은 책이지만 읽으면서 전혀 졸리지 않았다. 오히려 몰입에 몰입을 더해서 잠이 깨고 영감이 솟아나는 책이었다. 자아의 문제라는 끝날 것 같아 보이지 않은 여정에서 어떤 이정표를 발견한 느낌이라고 할까. 내용이 심오한 만큼 다 읽었음에도 내용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쉽지 않은 책이었다. 그렇더라도 나는 이 책이 나에게 찾아온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싯다르타라는 선물을 다시금 음미하면서 책의 내용을 다시금 회상해본다.

   싯다르타는 존경받는 브라만의 아들로서 뛰어난 지성과 빼어난 기품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싯다르타의 가슴 속에는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장 현명한 스승들에게서 사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로 향하는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추종자인 고빈다와 함께 귀족을 삶을 버리고 사문(沙門)이 되기 위해 출가한다. 초반부의 내용을 보고 실제의 부처를 모티브로 삼은 소설이라 그런지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이 부처의 출가와 비슷하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4대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부처가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출가했다는 설화보다는 소설 싯다르타의 자기 고뇌는 대다수 사람이 겪는 청소년기의 고민, 즉 현실과 자아 사이의 문제와 겹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의 고민이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인간 싯다르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고민 끝에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레일에서 이탈하여 다른 세상에 발을 내 딛은 많은 청소년이 그러하듯 싯다르타는 사문에 들어 수행하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은 거짓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죽이고 자아를 벗어나는 길로서 진리를 찾는 것이다. 사문의 길에 들어선 싯다르타는 세상을 보고 쓰디쓰고 또 악취가 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만물이 헛되고 자신 또한 죽임으로써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다니 세상이 정말 악취 나는 불결한 장소처럼 보일 법도 하다. 그러나 실제의 부처도 지나친 고행과 염세주의를 경계하고 고행자의 무리에서 벗어났듯, 소설의 싯다르타 또한 사문의 길은 단지 자아에서 도피하는 것과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염증을 느낀다. 그러던 중 열반자로 일컬어지는 고타마의 소문이 싯다르타의 귀에 닿는다. 그 소문을 듣고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사문에서 벗어나 고타마에게 당도한다. 거기서 고빈다는 고타마에게 귀의하기로 결정하지만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이유로서 싯다르타는 말한다. 고타마는 스스로 구도에 의해 완전자에 올랐으며 누군가의 설법을 들어서 그리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가르침으로도 해탈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없다. 여기서 싯다르타는 깨닫고 만다. 최고의 스승인 고타마의 가르침으로도 해탈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없다. ‘자아’는 누구도 가르쳐 줄 수 없다.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친구인 고빈다와 결별하고 스스로 힘으로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하기로 마음 먹는다. 사문의 길이 자기 자신의 자아를 기만하고, 또 도피하는 길이었다면 지금의 싯다르타가 걷기로 한 자신을 아는 길이야 말고 자신을 독대하고 극복하는 길인 것이다. 이 시점에서 싯다르타는 세상을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악취나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세상이 된 것이다. 물론 세상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다. 싯다르타의 마음이 바뀌었을 뿐이다. 사물의 의미와 본질 따위를 구태여 다른데서 찾는 것이 아니라 사물 본연을 보게 된 싯다르타의 각성에서 나는 인간 성장에 대한 감동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자신만의 관념을 덧씌우고 세상을 판단한다. -심지어 자신도 그렇게 판단한다- 이러한 색안경을 끼는 것이 세상을 인식하는데 더 용이해서 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관념과 사고 또한 자신의 뇌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 생각하면 소년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은 자신의 관념을 실제의 현실과 맞추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자신의 생각과 현실의 균형을 잡아 나가는 것, 그러면서 인간적으로 성숙하는 것이 진정한 어른이 되는 길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자아를 죽이고자 세상과 연을 끊는 엄격한 구도자의 삶에서, 세상을 본연 그대로 보고 자신을 알아가겠다는 싯다르타의 변화는 감동적이다. 엄격한 계율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인간의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 진정한 평온도 오지 않는다. 세상과의 관계 안에서만이 내가 생동하고 평온해 질 수 있는 것 아닐까.

   다시 소설의 내용으로 돌아가서, 싯다르타는 세속으로 뛰어들어서 기생 카마라와 상인 카마스바미를 만나고 그들과 교분을 맺게 된다. 카마라에게는 관능과 쾌락을 배우고, 카마스바미에게는 상업과 사교를 배우게 된다. 싯다르타는 많은 사람과 만나고, 돈을 벌고, 육체의 쾌락을 느끼지만 그것은 일종의 유희에 불과했다. 사문의 수행자로서의 싯다르타의 모습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고, 세상에 열정적으로 뛰어들기보다는 관조자로서 바라보는 것에 불과했다. 부와 명예, 여자를 손에 넣고도 담담하게 사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일견 이상적인 인생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싯다르타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었다. 카마라와 정을 나누면서 싯다르타와 카마라는 서로 말한다. 당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누구보다 우월한 재능을 가지고도 세상사에 고고한 존재처럼 임함으로써 진심을 보이지 않았으니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것이다. 그런 삶을 살면서 싯다르타는 점점 세속과 타성에 잠식되어 간다. 고고하게 세상을 조소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소인배가 되어 소심한 행태를 보인다. 그러면서 도박에 빠져들고, 돈을 잃고 벌면서 돈에 집착한다. 담담하게 장사를 하는 모습은 사라지고 도박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탐욕스럽게 돈을 버는 싯다르타에게 인생의 의미는 ‘자극’만 남은 것이었다. 자신에게서 도피하지 않기 위해 세상에 뛰어들었건만 싯다르타는 또 다른 도피의 길에 빠져든 것이다. 여기사 싯다르타는 독백한다. 유희야말로 윤회다. 놀이에 불과하다. 논다면 한 두 번은 재미있게 놀겠지만 그것이 끊임 없이 되풀이된다면? 나는 여기서 어떤 깨달음을 얻는 느낌이 들었다. 흔히 종교에서 말하는 윤회라는 것은 우리가 죽어서 다른 삶으로 태어나는 뜻 정도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내가 생각할 때 그것은 우리가 확인할 수 없으므로 그저 종교적 의미만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소설을 읽으니 그것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가 일상에서 행동하는 양식들이 바로 윤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음주 가무 같은 쾌락을 즐기면서도 다음 날 아침이 되면 후회를 하고, 그러고도 또 밤이 되면 쾌락을 찾아서 도심으로 몰려들고···. 이런 인생의 악순환들이 바로 윤회라는 모습으로 내게 보인 것이다. 이런 윤회의 고리는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싯다르타는 강에 투신해 죽음으로써 이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젊은 날의 영성을 잃고 타락한 자신의 육신을 소멸시킴으로써 윤회를 끝내고 안식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 싯다르타에게 어떤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바로 ‘옴’이었다. 만물의 소리를 상징한다는 ‘옴’을 들은 그 순간 싯다르타는 각성한다. 고타마도 인정할 정도로 지혜로운 자에서 세상의 모든 쾌락을 즐기는 자로 변모했었고, 뛰어난 지식과 실천력을 가진 젊은 사상가에서 초라하고 늙은 소인배로 화했던 싯다르타는 ‘옴’이라는 만물의 소리를 들음으로서 세상에 대한 사랑에 눈 뜨게 된 것이다. 그 순간 너무나 많은 지식에 빠져 오만했던 사상가로서의 싯다르타도 죽고, 편협하고 불안한 소인배로서의 싯다르타도 죽었다. 자아와 끊임없이 투쟁하던 싯다르타가 죽음으로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사랑하는 싯다르타가 태어났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부터는 싯다르타를 동경할 수 밖에 없었다. 깨달음에 깨달음을 덧붙이는 그의 모십이 내가 바라는 자아완성의 길을 생생히 묘사하는 듯한 모습이라 나에게는 이상향 같은 것으로만 보였다.

   한 꺼풀을 벗은 싯다르타는 일전에 고타마와 헤어질 때 자신을 태워준 뱃사공을 만나러 간다. 바수데바라는 이름의 그 뱃사공은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대자연이 넓은 강이 그저 만물의 소리를 듣고 있듯 바수데바는 묵묵히 들으며 치료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싯다르타는 강은 그저 흐르면서 현재만 존재하듯 과거와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그와의 대화에서 깨닫는다. 또한 모든 현존하는 존재의 번뇌는 시간에 연유하는 것을 깨닫는다. 바수데바에게 감명받은 싯다르타는 그와 함께 지내기로 하고 점점 그를 닮아간다. 뱃사공 일을 하던 싯다르타에게 고타마가 입멸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싯다르타는 뜻하지 않은 재회를 하게 된다. 고타마의 입멸을 순례하기 위해 카마라와 그녀의 아들이 배를 타러 온 것이다. 그녀의 아들은 싯다르타와 카마라가 헤어지기 전에 잉태한 싯다르타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카마라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면서 아들만을 남겨준다. 카마라의 장례를 치른 싯다르타는 아들을 부성애로 대하지만 도시에서 버릇없게 자란 아들은 계속해서 삐뚤어지고, 이윽고 싯다르타를 떠나고 만다. 싯다르타는 아들이 윤회에 빠지는 것을 보호하고자 사랑으로 대했으나, 아들은 그것이 가식에 찬 모습으로 보였던 것이다. 해탈을 타인이 도와줄 수 없는 것은 싯다르타가 일찍이 깨달은 것이다. 혈육의 정 앞에서는 그것을 실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할 수 없었던 자’가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랑에 바보가 되어버린 소인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모든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랑의 충동에 빠지고 욕망에 빠지는 소인들을 이해하고 형제처럼 여기고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소인들의 행동이야말로 무한한 인간사의 흐름을 만드는 것임을 알았다. 그에 비하면 모든 지식과 사상을 만드는 현자들은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었고, 사유하고 의식하는 것 외에는 소인들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을 깨달은 싯다르타를 보고 바수데바가 만족하며 떠나고, 싯다르타의 친구 고빈다가 싯다르타를 찾아오면서 결말이 가까워진다. 고빈다는 그의 스승인 고타마처럼 완성자의 모습을 한 싯다르타를 보고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느냐고 가르쳐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사상이란 말에 불과하고 단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사상과 교리에 얽매여 망설이는 고빈다에게 싯다르타는 자신의 이마에 입 맞추는 고빈다가 깨우침을 얻으면서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사실 이 책을 읽고 많은 상념이 떠올라서 정리하기 어려운 감이 있었다. 그 중에서 몇 가지 주제들을 내가 최근 생각해보던 문제와 연관되는 점이 있기에 그것으로 내 생각을 정리해본다. 그 문제란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부처가 태어나자마자 말했다는 설화에서 시작된다. 일견 오만한 듯 보이는 이 단어가 정확히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나름 찾아보았으나 명확하게 와 닿는 답은 없었다. 모든 만물은 독자적으로 불성을 지니고 존귀하다?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나타냈다? 단어로야 이해하지만 온전히 이해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싯다르타와 고타마의 대화에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규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바로 자아를 결정하는 것은 타인이 아닌 자신이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실마리가 잡히는 기분이었다. 타인이 어떤 깨달음도 하늘과 땅의 어떤 존재도 나의 자아를 대신해서 가져다 줄 수는 없고, 그런 점에서 유아독존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존하는 존재로서 나를 탐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싯다르타는 자신을 알기 위해 세속으로 떠난다. 세속적으로 사는 것이 구도자의 행동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을 세상에 던지지 않고서야 세상에 실존하는 나를 알 수 있다고, 모두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온몸으로 세상을 느끼는 것이 형이상적 관념에 빠져 진리를 더듬는 것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 마치 「희랍인조르바」에서 나오는 조르바가 어떤 관념에도 얽매이지 않고 열정적이고 충실하게 사는 모습이 주인공의 이성적이고 금욕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욕구와 진리를 모두 갈구하는 이중적 모습보다 더 완전한 삶의 형태로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나는 조르바도 아니고 싯다르타도 아니다. 굳이 그들의 판박이처럼 살려고 해도 그렇게 될 수 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다만 내가 그들에게 배운 것은, 관념에 얽매이는 것보다는 사람 자체에 충실한 내가 될 수 있게, 또 사람들 속에서 홀로 오만해지기보다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그리하여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내가 모든 존재 속에 깃들어 있는 신을 느낄 수 있도록, 그런 마음들을 내 가슴과 신체 곳곳에 스며들게 살라는 것이다. 삶으로부터 도피하지 않도록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비사야 후기
   작년보다 조용하고 독서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운영이 더욱 잘되는 느낌입니다. 도서관 관계자분들,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해 드립니다. 행복하세요.

 

<사진출처: 교보문고>